유학을 변명해 본다.

오늘날 한국의 전근대사회와 현대 한국 사회에도 존재하는 후진성을 지적하면서, 조선 시대에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인 유교에 공격적인 시각이 많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강변하는 주장을 펴기도 하는데, 내가 유학자가 아니지만, 유학에 대한 몇 가지 변명을 해보려고 한다.

1. 유학은 고리타분하다? 유학은 시초적으로 복고주의적인 경향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공자가 말하는 극기복례란, 춘추전국 시대라는 난세를 만든 악한 이기심을 극복하고, 예 곧 주나라 시대의 사회 질서틀로 돌아가자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런 예에 대한 강조는 유학의 보수적인 색체를 형성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공자가 시작한 유학이 이렇게 복고주의만 강조했다면 춘추전국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공자의 유학이 가져온 혁신이 있었는데, 왕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돈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공자에 따르면 왕은 덕으로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진정한 왕이란 예전에는 혈통적인 것이었다면, 인의예지를 갖춘 덕 있는 사람이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말하는 ‘군자(君子)’의 의미이다.

그래서 공자의 제자들은 잘 나가는 혈통의 금수저들만 있지 않았다. 공자가 사랑했던 제자들 중 안회 같은 사람은 집이 매우 가난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요절을 할 정도였다. 공자로 시작된 유학이 춘추전국 시대 그 생명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사회가 현실주의에 입각해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돌아갈 때, 그들은 자신의 생명도 가차없이 내어주며 인간성을 회복하려고 하였던 점이다. 맹자는 그렇지 못한 정치 지도자들에 대해서 갈아치우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겼고, 그 정신을 이은 유학자들은 배고파 굶고 분서갱유를 당하면서도 사회 윤리의 회복을 추구하였다. 춘추전국 시대 유학은 현실을 외면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런 현실 가운데 실천하는 지식인들이었다. 만약에 그들이 비현실적인 사람들이고, 그들의 생각이 비현실적이었다면, 춘추전국 시대의 가혹한 환경을 뚫고 존재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2. 유학은 경제 발전에는 도움이 안 된다? 한나라 시대 유학자들을 연구하는, 박사과정 중인 내 친구 이대우에 따르면, 원래 한나라 이전에 유학자들은 중상주의자들이었다. 그것이 바뀐 것은 한나라 때 들어와서, 오초칠국의 난 당시 중상 위주의 제후국들을 중농 위주의 왕실이 꺾었기 때문이었다. 한나라 왕실이 밀어주었던, 유학자들이 중농주의로 돌아선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는 셈이다.

중농주의를 가볍게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전근대 사회에서는 농업이 곧 국력이었고, 근세 프랑스 중농학파는 중상주의가 잘못이라고 보는 당시 최신의 학설이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시대에 와서야 상업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근대 이전의 트렌드는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고, 그 흐름은 애덤 스미스, 리카르도의 노동 가치설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사농공상이라는 도그마를 무턱대고 강조하는 것은, 유학자들의 경제관을 지나치게 폐쇄적으로 보는 것이고, 당시 시대상에 따르면 일리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다만, 바뀐 시대에도 그것을 고수하고, 조금의 변화도 허용하지 않았던, 구한말 유학자들의 책임은 크다고는 할 수 있다. 물론 구한말 유학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고, 의병 운동에서 독립운동으로 전화될 때의 유학자들의 모습은 유학이 가진 유연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자본주의와 유학의 관계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막스 베버의 저서인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라는 명저가 기여한 것은 적지 않다. , 상부구조/하부구조 관계에서 하부구조인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우위를 강조한 마르크스에 대해, 자본주의에 있어서, 상부구조인 문화의 역할이 작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당시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특정 문화와 사상 체제가 우월하며 자본주의가 태어나지 못했던 다른 세계는 문화적으로 지체된 존재들로 보기 쉽다.

하지만, 좁은 의미의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는 산업자본주의 이전부터 유럽은 스페인네덜란드를 거쳐가며, 자본주의의 순환 과정 속에 있었으며, 이것은 특정한 문화적 맥락에 얽힌 것은 아니었다. 특히 스페인네덜란드영국미국의 자본주의 중심지의 이동 과정을 주시하다 보면, 그것은 특정 문화적 맥락과 사상 체계가 자본주의 패권국을 차지하는 근본적인 요소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문화라는 것은 상수가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변화에 따라 상호 작용을 통해 변모하는 모습을 보인다. 영국 자본주의의 발전을 보더라도, 영국 내의 문화적 맥락은 자본주의를 추동한 것도 있었고, 반대로 이를 가로막는 것도 존재하였다. 그 와중에서 보다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흐름이 승리를 한 것이었을 뿐이다. 이런 모습은 자본주의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던, 동부 유럽에서도 발생한 일이었고, 프로이센의 경우 매우 자본주의와 거리가 먼 처지였지만,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 아래 급속하게 자본주의의 길을 걷게 된다.

요컨데, 성리학이 주요 이데올로기였던 조선이라고, 자본주의로의 길, 근대화의 길이라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서세동점의 흐름을 이끌었던 자본주의 초강대국이었던 영국은 아시아 지역에 대해, 그것을 용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중국은 아편 전쟁, 일본은 페리 제독을 통해 강제적 개항과 영국과 초슈사츠마 전쟁을 겪었으며, 한국은 그 일본에 의한 강제적 개항을 겪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의 정치 지도자들 모두 제대로 된 방향으로 그 나라를 이끌지 않았다. 쇄국정책을 취하고 전근대적인 농업 위주의 경제체제를 가지고서는 그 한계점이 명확하였던 것이고, 조선의 왕과 관료들은 너무나 안일하였던 것이다. 실제 성리학적 가치를 버리고, 서구 열강과 같은 민족국가로서 대한제국의 길을 천명한 고종이 취한 정책은 대한제국의 사실상 헌법이나 다를 바 없던, “대한국 국제”에서 드러나듯이 절대주의 정책이었다. 이것은 서세동점의 시대상에서 아무런 힘도 없고 무익한 정책이었을 뿐이다. 그 관료들도 친일, 친러, 친미 등으로 우왕좌왕했고, 실질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것은 특정 사상의 한계성이라기 보다, 그 개개의 어리석음이자, 그 시대에 압도적인 서세동점의 흐름에 매몰된 것이기도 했다. 매우 힘들기는 했지만, 터키의 케말 파샤와 같이 빠른 전환을 추구했다면, 조선도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는 만약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 구한말의 역사, 일제 식민지의 역사는, 시대적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유연성을 갖지 못한, 정치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에 대한 아쉬움을 갖게 한다. 그것이 유학에 대한 오명이 되어버린 것도 많은 아쉬움을 갖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의 사상 체계에 명백히 한계를 긋고, 서구 문명이 가진 이데올로기 최고를 외치는 것도 올바른 이해가 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사상 체계라는 것은 역사적 산물이자, 여러 상호 관계에서 나오는 상수 아닌 변수일 뿐이다. 특정 이데올로기에 안주하고, 특정 문명의 사상 체계를 최고인양 높이는 이들은, 오히려 조선 말기의 유학자와 같은 우를 범하는 셈이다. 이것은 기층민들뿐만 아니라, 몇몇 엘리트 역사학자들에게서도 보이는 모습인데,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들을 교묘한 생각의 덫에 가두는 것이며, 그 나라의 미래에도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역사적 가능성에 우리는 생각을 늘 열어둬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다시 급변하는 세계 체제 속에서 살아남는 길일 것이다.

이번 대선에 대한 생각

이번 대선 판세를 잘못 읽으면 안 되는 게, 지금의 정치적 경합 구도는 정당 정치 vs 이전까지의 비정당정치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 눈에 이게 팬클럽처럼 보인다는 것은, 여기에 부가되어 색이 칠해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부채의식 또는 죄책감’만 읽고 있기 때문이다. 아 물론 감성적으로 문재인 후보의 스타일, 외모를 좋아하는 분들도 많다.

참고로 지난 총선 이후 더불어민주당은 전국 정당에 가까운 유일한 정당이다. 샤츠슈나이더의 정당정치에 제일 가깝게 부합하는,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대중 정당인 셈이다. 재미있게도, 안철수의 새정치 타이틀이 붙을만한 정당이며, 이것은 묘하게도 넷상의 문재인 대표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모두가 잘 부각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지역주의, 지역감정 역시, 기존의 계파 중심 정당구조와도 엮여 있는데, 계파를 지지하는 지역유지와 결탁하였고, 야당은 국가권력을 향한 의지를 상실하고 여당과 타협하는 수준에서 지역의 맹주에 안주하게 된다. 또 지역 유지들은 지방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차지하고, 온갖 비리와 범죄를 묵인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벌어졌던 게 미국에서는, 링컨의 노예주 개조가 실패한 19세기 말의 공화당-민주당의 상황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철저히 예전 노예주의 입장을 대변했고, 당시 남부에서의 흑인들의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 수준이었다. 우리나라도, 민주당이 두 번에 걸쳐 정권 획득을 실패했을 때, 지역에서 흉흉한 일들이 많았다. 신안노예 사건 같은 일은 단순히 그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정권 획득을 포기하고 지역정당으로 타협한 한 정당의 우울한 그림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역정당이길 거부하고, 당당하게 대권에 도전했을 때, 여러 한계점에도 그 정당은 생명을 가질 수 있었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위대했던 점은 대권에 도전하였고, 그것이 평민당이나 신민당이나 단순히 지역 정당으로서만 남지 않게 했던 것이다. 일단 기존 권력에 도전하면서, 지역에 국한된 모습은 많이 희석될 수 있었다. 이들의 카리스마적인 정치력은, 지역유지와 결탁된 계파들이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카리스마적 정치인들도 기존 정당의 본질 자체는 바꾸지 못했다. 평민당이나 신민당이나, 호남 또는 부산-경남의 지역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놀라운 대중적 인기를 누린 노무현 대통령조차 자기가 속한 정당과 대립관계에 있었고, 새로운 정당을 만들었으나 덩치만 컸지 구심점이 없는 그런 당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 후보가 재조성한 더불어민주당은 계파들이, 카리스마적인 한 정치인에 의해 제어되는 것이 아니라, 권리당원들이 통제하는 형태로 시스템을 바꿔버렸다. 그러니깐 중견 정치인조차 공천권을 함부로 자기 계파에 나눌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권리당원들과 직간접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이 전국, 특히 수도권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으며, 자발적 참여와 적극성을 강하게 띄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촛불집회와 탄핵 때 온-오프라인에서 박근혜 정권을 궁지로 몰아넣은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기존의 정치 문법에 익숙한 정당들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사람들을 친문 패권이나 문빠로 몰아붙이는 것은 참으로 그 본질을 잊고 있는 셈이다.

촛불집회와 탄핵에서 드러났듯이, 박근혜 정권을 궁지로 몰아 붙일 정도로, 강력한 원동력을 가졌으며, 온-오프라인을 아우른 집단적인 지식을 가졌고, 지역의 장벽을 넘어버린, 새로운 정치집단과 손을 잡은, 시스템적으로 기존의 정치 정당을 넘어선 새로운 전국적인 대중정당의 존재는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기존 정당들이 당황해 하는 것은 이 점이다. 박근혜 탄핵에서 드러난 그 강력한 힘이 자신들에게 닥치니 대응을 못 하는 것이다. 비난할 것이 아니라,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지부터 생각하는 게 순리다.

지오반니 아리기가 본 식민지 조선

“우리가 이 책 전체에서 주장해 왔듯이, 산업 팽창률과 그와 관련해 더 협소한 의미의 산업 생산률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경쟁 우위를 둘러싼 싸움에서 국가들의 성공이나 실패를 측정하는 지표로서 매우 신뢰성이 떨어진다… 중략.. 그 산업화에도 불구하고, 제 2차 세계대전 발발기에 일본은 유기적 중심의 일인당 GNP의 1/5 수준인 중간 소득 국가로 머물러 있었다. 가용한 빈약한 자료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로는 조선과 타이완도 더 낫지 않았고, 아마 더 나빴을 것이다. 급속한 산업화와 더욱 거대한 착취로 두 식민지 모두 저소득 층위에 옭매여 있었으며, 일인당 GNP는 유기적 중심의 10% 밑이었다.” 장기 20세기, 지오반니 아리기, p558~559

현대 일본의 경제성장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일본이 현재 경제적 위치가 된 것은, 이전의 경제적 능력도, 메이지 유신도 아니라, 한국전쟁 후 일본을 거하게 밀어준 미국의 푸쉬 때문입니다.

일본의 경우 1940년대에만 해도, GNP가 독일, 에스파냐, 이탈리아만도 못 했습니다. 일본은 1970년에 이탈리아, 1985년에 서독을 GNP로 추월하게 되죠.

이렇게 된 데에서는 미국의 정책이 한국전쟁 이후, 마샬 플랜마냥 일본의 산업을 강화해야 한다는 쪽으로 선회하였고, 미국은 1960년대에 일본 중심으로 한국과 대만 쪽의 산업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이로써 일본은 GATT에 가입하고, 미국 시장에 특권적 접근이 가능했고, 베트남전에서처럼 미국의 해외 군사지출에 특권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미국은 대일 무역 흑자였는데, 1970년 대가 지나가면 막대한 대일 무역적자로 돌아섭니다.

일본은 이런 우호적인 환경 속에서, 탈중심적 다층의 하청을 통해 수익을 창출합니다. 처음에는 일본 국내에서 대형, 중형, 소형 기업들의 하청이 이뤄지다가, 이것이 동아시아 각 지역으로 파급됩니다. 삼성도 이런 하청망 가운데 있었고, 노무라 증권 사람이 중역 회의에 있었다고 하죠. 이 과정은 2000년대 중국의 급격한 산업화까지 파급됩니다.

이런 과정은 결국 미국의 손으로 이뤄진 경제적 위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다만 이 가운데 일본이 한 것은 하청을 통해, 거대한 이윤을 낳을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일본 스스로도 이를 통제할 수는 없었고, 중국의 거대한 산업화와 동아시아의 또 다른 갈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2차 세계대전 전의 산업 체계와 연관시키는 것, 더 나아가 메이지 유신 전의 일본의 경제적 조건과 결부시킨 것은, 사실 현대 일본 사학자들의 거한 ‘일뽕’의 산물입니다. 한국 현대사를 ‘국뽕’의 관점으로 보는 것도 위험하지만, 더 큰 위협은 ‘일뽕’으로 만든 역사관에 있고, 먼저 이것을 피하지 않으면 한국 현대사를 이상한 관점에서 볼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