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0일 / kestrel / 0 Comments
얼마 전 미국의 한 매체에서 미국이 북한에 대한 사이버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참조: http://v.media.daum.net/v/20180217182527550). 그렇다면 미국이 북한에 대해 실제 사이버 공격을 어떻게 수행할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발언이 실제로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지, 아니면 북한에 대해 핵 억지 차원에서 미 정부가 경고를 한 것인지, 이것을 판단하는 것이 한국의 안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미국의 사이버전을 담당하는 조직은 다음과 같습니다. NSA와 사이버사령부가 결합되어 있고, 그 밑에 공군, 해군, 육군의 사이버전 부대들이 위치해 있습니다.
현재 사이버 첩보 작전 외에, 미국이 자신의 정치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행할 수 있는 사이버 공격 시나리오는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광범위한 사이버 기반시설이나 기타 주요 기반 시설에 대한 공격입니다. 이러한 형태는 에스토니아 전산망을 마비시킨 2007년 에스토니아에 대한 사이버 공격, 2013년 한국의 언론사와 금융기관을 노린 사이버공격을 들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이러한 공격을 수행한다면, 미국은 북한의 폐쇄망인 광명망을 공격하여 마비시킬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광명망과 연결된 정부기관과 연구기관의 활동에 장애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미국이 취할 사이버공격 중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공격 방식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문적인 사이버부대가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더라도, 적은 비용에, 짧은 시간 내에, 기술적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애국주의 해커들을 동원해서 수행할 수 있는 일입니다. 관련 게시판이나 커뮤니티에 광명망으로 침투할 수 있는 해킹 툴과 자동화된 봇넷을 올리기만 해도, 자발적으로 수행할 해커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얻어질 효과는 크지 않습니다. 북한 체제가 인터넷이 발달된 서구권 국가에 비해, 기반 시설들이 사이버 공간과 결합한 정도가 높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광명망이 마비되는 것과, 인터넷이 마비된 한국이나 미국과는 차이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광명망이 마비된다고 북한의 전쟁 의지가 약화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미국에 대한 적개감이 커짐으로서, 북한의 전쟁 의지를 강화할 우려가 존재합니다. 무엇보다 북핵을 제거한다는 것이 미국의 전략적 목표라면, 이 방식으로 결코 달성할 수 없습니다.
둘째, 미국이 취할 수 있는 또 다른 공격 형태는 보다 군사적 목적에 부합하는 사이버 공간을 통한 군사시설의 마비나 파괴일 것입니다. 이것은 2007년 이스라엘의 시리아 알키바르 핵시설 공습에서, 시리아의 레이더 사이트를 마비시킨 형태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납니다.
미국이 만약 이와 같은 공격을 수행한다면, 자국의 공군력이나 기타 물리적 타격 공격과 함께 해, 사이버공격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것은 앞서의 사이버 공격보다 난이도가 높습니다. 통상적으로 군 시설의 경우 다른 네트워크와 연결이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고, 여러 보안과 통제 장치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도의 기술을 가진 전문적인 사이버 공격 부대가 수행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상대적으로 긴 시간과 많은 비용이 필요합니다.
이 방식을 미국이 취한다면, 그것은 실질적인 물리적 타격과 결합된 형태이며, 따라서 일반적인 군사 행동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이것은 많은 국제적인 반대에 부딪힐 수 있으며, 또한, 물리적 타격에 참여한 군 병력의 손실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미 정부 입장에서는 여론의 반대가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가 맞닿아 있는 북한의 지정학적 위치상, 중국과 러시아의 갈등을 감수해야 한다는 어려움도 더해집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북한과 미국의 전면전이나 다를 바 없으며, 확전 시에는 한국만이 아닌 국제전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미국이 사이버 공격으로 이 방식을 선택한다면, 많은 위험을 안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사이버 공격은 사이버 무기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사이버 무기의 시초는 스턱스넷으로서, 부수적인 피해를 발생시키지 않도록, 고도로 프로그래밍된 이 웜바이러스는, 이란의 나탄 핵시설의 원심분리기를 파괴하였습니다. 이와 유사한 사이버 무기를 제작해서, 핵무기 시설이나 핵미사일 시설을 마비시키거나 파괴하는 것을 미국은 고려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이버 무기는 다른 사이버공격 방법보다, 사이버 공격 자체에 한해서는 가장 많은 비용과 시간, 그리고 인력이 필요합니다. 스턱스넷의 경우 다른 일반적인 웜바이러스보다 고도로 프로그래밍 되었는데, 이는 부수적인 피해를 발생시키지 않고, 목표로한 타겟에 정확하게 그 피해를 가져오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제대로 작용할 수 있도록, 이란의 나탄 핵시설과 동일하게 만들어진 모의 테스트 공간에서 실험되었고, 따라서 많은 시간과 비용이 추가로 필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망분리 등이 적용된 핵시설에 접근하는데, USB 드라이브가 사용되었고, 이를 통해 접근하는 데에도 여러 시간이 들어갔습니다. 물론, 사이버 공격이 뉴스로 드러나기 이전부터 이 사이버 작전이 계획되어 있었다면, 미국이 이 사이버 공격을 수행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현존하는 문제가 아직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스턱스넷은 결국 이란의 핵시설뿐만 아니라, 웜바이러스였기 때문에, 많은 PC를 감염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은 이미 이라크전 당시 사이버 무기를 이용한 작전을 고려했지만, 자신들의 사이버 무기가 이라크 은행 등과 연결된 유럽의 은행들에 감염되어 부수적인 피해가 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실제로 작전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사이버 무기가 북한과 밀접하게 관련된 중국의 은행에 감염될 경우, 이것이 가져올 파장도 결코 적지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밀접한 상업의 관련성을 갖고 있는,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이 사이버 무기가 부수적인 피해를 가져온다면, 적지 않은 문제를 가져올 것입니다. 따라서, 미국이 이 작전을 쉽게 취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최초의 사이버 무기인 스턱스넷은 절반의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이란은 자신의 감염된 원심 분리기를, 국산 장비로 대체하였고, 스턱스넷이 작용할 취약점이 사라졌기 때문에, 결국 이란은 지연되긴 하였지만, 자신의 핵무장 프로젝트를 계속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이버 무기의 가능성이 제한적이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세 가지 사이버 공격의 형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따라서, 미국이 사이버 공격을 할 수도 있다고 말하더라도, 이것이 미국이 손쉽게 사이버 작전을 시도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미국이 북핵의 위협도를 얼마만큼 크게 보고 그 위험을 감수할 의지를 갖는가에 따라, 그리고 북핵 제거 작전 대신, 다른 전략적 목표를 가진다면, 미국이 사이버 작전을 수행할 가능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현 단계에서, 미국이 사이버 공격을 수행할 것인지를 예측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만, 북핵 제거가 미국의 전략적 목표라면, 현재까지의 시나리오 상에서는 사이버 공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이 많지 않다고 봅니다.
2018년 2월 7일 / kestrel / 0 Comments
기존의 사이버전 훈련장 구성은 그림 왼쪽처럼 컴퓨터가 세팅된 원탁에 앉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컴퓨터 본체와 모니터로 인해 서로의 의견을 앉아서 조율하기는 어렵고, 한 팀원이 정반대편 사람에게 다가가려면 긴 동선을 갖는 등의 불편함이 존재합니다.
이런 점을 e-스포츠에서의 방식을 보면서 이를 개선할 아이디어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림 오른쪽과 같습니다. e-스포츠팀은 의사소통의 필요성을 보다 간편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코치가 잘 지도 및 매개하기 위해서 직선형 방식을 취하는 게 대부분입니다. 또 아무래도, 저런 구성이 방송사 입장에서도 구성하기 편해서인 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양 끝쪽의 이동 동선이 길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코치나 매개자가 있으면 사이버전 훈련에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정말로 좋은 방식은 그림 오른쪽 하단 방식입니다. 여기서는 서로 간의 접근 동선이 짧고, 회전형 의자를 사용하면 더욱 더 빠른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이 방식은 데프콘과 같은 해킹 대회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방식입니다. 물론 구성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실제 대회에서는 긴 테이블을 이용해서 가운데를 비우고 둘러싼 형태로 만들곤 합니다.
아무튼 오른쪽과 같은 형태로 개선하는 게 실무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17년 10월 16일 / kestrel / 0 Comments
오늘날 한국의 전근대사회와 현대 한국 사회에도 존재하는 후진성을 지적하면서, 조선 시대에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인 유교에 공격적인 시각이 많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강변하는 주장을 펴기도 하는데, 내가 유학자가 아니지만, 유학에 대한 몇 가지 변명을 해보려고 한다.
1. 유학은 고리타분하다? 유학은 시초적으로 복고주의적인 경향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공자가 말하는 극기복례란, 춘추전국 시대라는 난세를 만든 악한 이기심을 극복하고, 예 곧 주나라 시대의 사회 질서틀로 돌아가자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런 예에 대한 강조는 유학의 보수적인 색체를 형성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공자가 시작한 유학이 이렇게 복고주의만 강조했다면 춘추전국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공자의 유학이 가져온 혁신이 있었는데, 왕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돈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공자에 따르면 왕은 덕으로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진정한 왕이란 예전에는 혈통적인 것이었다면, 인의예지를 갖춘 덕 있는 사람이 왕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말하는 ‘군자(君子)’의 의미이다.
그래서 공자의 제자들은 잘 나가는 혈통의 금수저들만 있지 않았다. 공자가 사랑했던 제자들 중 안회 같은 사람은 집이 매우 가난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요절을 할 정도였다. 공자로 시작된 유학이 춘추전국 시대 그 생명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사회가 현실주의에 입각해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돌아갈 때, 그들은 자신의 생명도 가차없이 내어주며 인간성을 회복하려고 하였던 점이다. 맹자는 그렇지 못한 정치 지도자들에 대해서 갈아치우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겼고, 그 정신을 이은 유학자들은 배고파 굶고 분서갱유를 당하면서도 사회 윤리의 회복을 추구하였다. 춘추전국 시대 유학은 현실을 외면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런 현실 가운데 실천하는 지식인들이었다. 만약에 그들이 비현실적인 사람들이고, 그들의 생각이 비현실적이었다면, 춘추전국 시대의 가혹한 환경을 뚫고 존재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2. 유학은 경제 발전에는 도움이 안 된다? 한나라 시대 유학자들을 연구하는, 박사과정 중인 내 친구 이대우에 따르면, 원래 한나라 이전에 유학자들은 중상주의자들이었다. 그것이 바뀐 것은 한나라 때 들어와서, 오초칠국의 난 당시 중상 위주의 제후국들을 중농 위주의 왕실이 꺾었기 때문이었다. 한나라 왕실이 밀어주었던, 유학자들이 중농주의로 돌아선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는 셈이다.
중농주의를 가볍게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전근대 사회에서는 농업이 곧 국력이었고, 근세 프랑스 중농학파는 중상주의가 잘못이라고 보는 당시 최신의 학설이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시대에 와서야 상업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근대 이전의 트렌드는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고, 그 흐름은 애덤 스미스, 리카르도의 노동 가치설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사농공상이라는 도그마를 무턱대고 강조하는 것은, 유학자들의 경제관을 지나치게 폐쇄적으로 보는 것이고, 당시 시대상에 따르면 일리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다만, 바뀐 시대에도 그것을 고수하고, 조금의 변화도 허용하지 않았던, 구한말 유학자들의 책임은 크다고는 할 수 있다. 물론 구한말 유학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고, 의병 운동에서 독립운동으로 전화될 때의 유학자들의 모습은 유학이 가진 유연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자본주의와 유학의 관계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막스 베버의 저서인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라는 명저가 기여한 것은 적지 않다. 즉, 상부구조/하부구조 관계에서 하부구조인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우위를 강조한 마르크스에 대해, 자본주의에 있어서, 상부구조인 문화의 역할이 작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당시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특정 문화와 사상 체제가 우월하며 자본주의가 태어나지 못했던 다른 세계는 문화적으로 지체된 존재들로 보기 쉽다.
하지만, 좁은 의미의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는 산업자본주의 이전부터 유럽은 스페인–네덜란드를 거쳐가며, 자본주의의 순환 과정 속에 있었으며, 이것은 특정한 문화적 맥락에 얽힌 것은 아니었다. 특히 스페인–네덜란드–영국–미국의 자본주의 중심지의 이동 과정을 주시하다 보면, 그것은 특정 문화적 맥락과 사상 체계가 자본주의 패권국을 차지하는 근본적인 요소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문화라는 것은 상수가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변화에 따라 상호 작용을 통해 변모하는 모습을 보인다. 영국 자본주의의 발전을 보더라도, 영국 내의 문화적 맥락은 자본주의를 추동한 것도 있었고, 반대로 이를 가로막는 것도 존재하였다. 그 와중에서 보다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흐름이 승리를 한 것이었을 뿐이다. 이런 모습은 자본주의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던, 동부 유럽에서도 발생한 일이었고, 프로이센의 경우 매우 자본주의와 거리가 먼 처지였지만,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 아래 급속하게 자본주의의 길을 걷게 된다.
요컨데, 성리학이 주요 이데올로기였던 조선이라고, 자본주의로의 길, 근대화의 길이라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서세동점의 흐름을 이끌었던 자본주의 초강대국이었던 영국은 아시아 지역에 대해, 그것을 용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중국은 아편 전쟁, 일본은 페리 제독을 통해 강제적 개항과 영국과 초슈–사츠마 전쟁을 겪었으며, 한국은 그 일본에 의한 강제적 개항을 겪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의 정치 지도자들 모두 제대로 된 방향으로 그 나라를 이끌지 않았다. 쇄국정책을 취하고 전근대적인 농업 위주의 경제체제를 가지고서는 그 한계점이 명확하였던 것이고, 조선의 왕과 관료들은 너무나 안일하였던 것이다. 실제 성리학적 가치를 버리고, 서구 열강과 같은 민족국가로서 대한제국의 길을 천명한 고종이 취한 정책은 대한제국의 사실상 헌법이나 다를 바 없던, “대한국 국제”에서 드러나듯이 절대주의 정책이었다. 이것은 서세동점의 시대상에서 아무런 힘도 없고 무익한 정책이었을 뿐이다. 그 관료들도 친일, 친러, 친미 등으로 우왕좌왕했고, 실질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것은 특정 사상의 한계성이라기 보다, 그 개개의 어리석음이자, 그 시대에 압도적인 서세동점의 흐름에 매몰된 것이기도 했다. 매우 힘들기는 했지만, 터키의 케말 파샤와 같이 빠른 전환을 추구했다면, 조선도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는 만약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 구한말의 역사, 일제 식민지의 역사는, 시대적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유연성을 갖지 못한, 정치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에 대한 아쉬움을 갖게 한다. 그것이 유학에 대한 오명이 되어버린 것도 많은 아쉬움을 갖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의 사상 체계에 명백히 한계를 긋고, 서구 문명이 가진 이데올로기 최고를 외치는 것도 올바른 이해가 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사상 체계라는 것은 역사적 산물이자, 여러 상호 관계에서 나오는 상수 아닌 변수일 뿐이다. 특정 이데올로기에 안주하고, 특정 문명의 사상 체계를 최고인양 높이는 이들은, 오히려 조선 말기의 유학자와 같은 우를 범하는 셈이다. 이것은 기층민들뿐만 아니라, 몇몇 엘리트 역사학자들에게서도 보이는 모습인데,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들을 교묘한 생각의 덫에 가두는 것이며, 그 나라의 미래에도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역사적 가능성에 우리는 생각을 늘 열어둬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다시 급변하는 세계 체제 속에서 살아남는 길일 것이다.
2017년 8월 24일 / kestrel / 0 Comments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디도서 2:1~14(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사도 바울은 그레데 교회를 위해 파송된 디도에게 여러 권면을 합니다. 이 바울의 권면은 우리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도 여러 직분을 담당할 수도 있고, 또 그 권면에서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직분 맡은 사람은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며, 여러가지로 권면을 하고, 범사에 본을 보여, 부패하지 않고, 단정하며, 선한 일과 바른 말을 해야 합니다. 또한 늙은 남자는 절제, 경건, 신중함을 가지고, 믿음, 사랑, 인내에 온전해야 하고, 늙은 여자는 행실이 거룩하고, 선한 것을 가르치며, 잘 교훈해야 합니다. 또, 젊은 여자들은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또한 젊은 남자들은 신중함, 곧 자기를 잘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종은 자기 상전들에 대해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화가 난다고 함부로 거슬러 말해서는 안 됩니다. 상전의 물건을 훔쳐서도 안 될 것입니다. 신실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양성평등의 시대에 이게 왠 말이냐, 아니면 요즘 같은 88만원 세대에 너무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당대 그레데인들은 거짓말을 잘하고, 악한 일을 자주하며, 세상 쾌락에 탐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술마시고, 가정을 돌보지 않고, 상전의 것을 가로채는 일이 허다한 세대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이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의 권면이 가진 목적은 이것입니다. 곧 선한 행실로, 대적하는 자들이 빌미를 얻어 모함하는 입을 막고,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본질입니다. 우리가 선한 행실로 악한 자들의 입을 막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빛나게 하는 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복음의 의미를 상기시켜줍니다. 오늘 요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그렇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도무지 구원받지 못할 죄인 중에 괴수든, 복음을 믿는 자에게는 값없이 구원이 주어집니다. 14절을 또한 보십시오.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그 끔찍한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이뤄진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우리를 깨끗케 하사 거룩하신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게 걸맞게 이전 행실을 버리고 선한 일을 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런 우리가 되도록,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금생에 있어서, 우리가 경건하지 않은 것, 이 세상을 정욕을 버리게 하시며,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게 하십니다(13). 또한 내생에 우리에게 다가올 복스러운 소망과,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도록 하셨습니다(14).
이렇듯 우리는 이전의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절제하고, 때로는 남편과 세상 상전을 비롯한 다른 이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우리가 비굴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악한 자들의 입을 막고 선한 행실로 하나님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숱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또 얼마전 청소년 부흥사 성추행 기사 같이, 우리 안의 수많은 문제가 드러나 더더욱 고개를 들 수 없는 지경입니다. 이런 세태 가운데 우리가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것처럼 선한 말과 선한 행실과 낮아져 섬겨야 하겠습니다. 악한 자들의 입을 막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의 은혜를 드러내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빛나게 하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가 기도하고 개인 기도하시겠습니다.
2017년 4월 21일 / kestrel / 0 Comments
이번 대선 판세를 잘못 읽으면 안 되는 게, 지금의 정치적 경합 구도는 정당 정치 vs 이전까지의 비정당정치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 눈에 이게 팬클럽처럼 보인다는 것은, 여기에 부가되어 색이 칠해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부채의식 또는 죄책감’만 읽고 있기 때문이다. 아 물론 감성적으로 문재인 후보의 스타일, 외모를 좋아하는 분들도 많다.
참고로 지난 총선 이후 더불어민주당은 전국 정당에 가까운 유일한 정당이다. 샤츠슈나이더의 정당정치에 제일 가깝게 부합하는,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대중 정당인 셈이다. 재미있게도, 안철수의 새정치 타이틀이 붙을만한 정당이며, 이것은 묘하게도 넷상의 문재인 대표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모두가 잘 부각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지역주의, 지역감정 역시, 기존의 계파 중심 정당구조와도 엮여 있는데, 계파를 지지하는 지역유지와 결탁하였고, 야당은 국가권력을 향한 의지를 상실하고 여당과 타협하는 수준에서 지역의 맹주에 안주하게 된다. 또 지역 유지들은 지방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차지하고, 온갖 비리와 범죄를 묵인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벌어졌던 게 미국에서는, 링컨의 노예주 개조가 실패한 19세기 말의 공화당-민주당의 상황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철저히 예전 노예주의 입장을 대변했고, 당시 남부에서의 흑인들의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 수준이었다. 우리나라도, 민주당이 두 번에 걸쳐 정권 획득을 실패했을 때, 지역에서 흉흉한 일들이 많았다. 신안노예 사건 같은 일은 단순히 그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정권 획득을 포기하고 지역정당으로 타협한 한 정당의 우울한 그림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역정당이길 거부하고, 당당하게 대권에 도전했을 때, 여러 한계점에도 그 정당은 생명을 가질 수 있었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위대했던 점은 대권에 도전하였고, 그것이 평민당이나 신민당이나 단순히 지역 정당으로서만 남지 않게 했던 것이다. 일단 기존 권력에 도전하면서, 지역에 국한된 모습은 많이 희석될 수 있었다. 이들의 카리스마적인 정치력은, 지역유지와 결탁된 계파들이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카리스마적 정치인들도 기존 정당의 본질 자체는 바꾸지 못했다. 평민당이나 신민당이나, 호남 또는 부산-경남의 지역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놀라운 대중적 인기를 누린 노무현 대통령조차 자기가 속한 정당과 대립관계에 있었고, 새로운 정당을 만들었으나 덩치만 컸지 구심점이 없는 그런 당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 후보가 재조성한 더불어민주당은 계파들이, 카리스마적인 한 정치인에 의해 제어되는 것이 아니라, 권리당원들이 통제하는 형태로 시스템을 바꿔버렸다. 그러니깐 중견 정치인조차 공천권을 함부로 자기 계파에 나눌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권리당원들과 직간접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이 전국, 특히 수도권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으며, 자발적 참여와 적극성을 강하게 띄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촛불집회와 탄핵 때 온-오프라인에서 박근혜 정권을 궁지로 몰아넣은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기존의 정치 문법에 익숙한 정당들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사람들을 친문 패권이나 문빠로 몰아붙이는 것은 참으로 그 본질을 잊고 있는 셈이다.
촛불집회와 탄핵에서 드러났듯이, 박근혜 정권을 궁지로 몰아 붙일 정도로, 강력한 원동력을 가졌으며, 온-오프라인을 아우른 집단적인 지식을 가졌고, 지역의 장벽을 넘어버린, 새로운 정치집단과 손을 잡은, 시스템적으로 기존의 정치 정당을 넘어선 새로운 전국적인 대중정당의 존재는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기존 정당들이 당황해 하는 것은 이 점이다. 박근혜 탄핵에서 드러난 그 강력한 힘이 자신들에게 닥치니 대응을 못 하는 것이다. 비난할 것이 아니라,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지부터 생각하는 게 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