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골로새서 3:18~4:1(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소망 가운데 사랑하며
골로새서 3:18~4:1(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일본이 현재 경제적 위치가 된 것은, 이전의 경제적 능력도, 메이지 유신도 아니라, 한국전쟁 후 일본을 거하게 밀어준 미국의 푸쉬 때문입니다.
일본의 경우 1940년대에만 해도, GNP가 독일, 에스파냐, 이탈리아만도 못 했습니다. 일본은 1970년에 이탈리아, 1985년에 서독을 GNP로 추월하게 되죠.
이렇게 된 데에서는 미국의 정책이 한국전쟁 이후, 마샬 플랜마냥 일본의 산업을 강화해야 한다는 쪽으로 선회하였고, 미국은 1960년대에 일본 중심으로 한국과 대만 쪽의 산업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이로써 일본은 GATT에 가입하고, 미국 시장에 특권적 접근이 가능했고, 베트남전에서처럼 미국의 해외 군사지출에 특권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미국은 대일 무역 흑자였는데, 1970년 대가 지나가면 막대한 대일 무역적자로 돌아섭니다.
일본은 이런 우호적인 환경 속에서, 탈중심적 다층의 하청을 통해 수익을 창출합니다. 처음에는 일본 국내에서 대형, 중형, 소형 기업들의 하청이 이뤄지다가, 이것이 동아시아 각 지역으로 파급됩니다. 삼성도 이런 하청망 가운데 있었고, 노무라 증권 사람이 중역 회의에 있었다고 하죠. 이 과정은 2000년대 중국의 급격한 산업화까지 파급됩니다.
이런 과정은 결국 미국의 손으로 이뤄진 경제적 위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다만 이 가운데 일본이 한 것은 하청을 통해, 거대한 이윤을 낳을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일본 스스로도 이를 통제할 수는 없었고, 중국의 거대한 산업화와 동아시아의 또 다른 갈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2차 세계대전 전의 산업 체계와 연관시키는 것, 더 나아가 메이지 유신 전의 일본의 경제적 조건과 결부시킨 것은, 사실 현대 일본 사학자들의 거한 ‘일뽕’의 산물입니다. 한국 현대사를 ‘국뽕’의 관점으로 보는 것도 위험하지만, 더 큰 위협은 ‘일뽕’으로 만든 역사관에 있고, 먼저 이것을 피하지 않으면 한국 현대사를 이상한 관점에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골로새서 3:12~17(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사실 공동체 내에 있으면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수평적 갈등도 있지만, 수직적 갈등도 생기고, 이런 것들이 잘 해결되면 좋겠지만, 앙금과 미움이 남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택하시고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가 되었으니, 겸손, 자비, 긍휼, 온유, 오래 참음의 예수님을 따르고, 불만에 대해서는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라고 당부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 사랑을 더하라 말합니다. 이것은 옷을 입을 때의 벨트와도 같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평강을 주장하고, 감사하며, 권면하고, 찬송해야 합니다. 늘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감사해야 합니다.
저는 이런 게 약한 죄인입니다. 위의 목자님들, 아래 형제자매들, 그리고 동기들 모두에 있어서, 사랑하기보다 불만을 품고 미워하고 용서하기를 더디하였습니다. 꽁해서 어디 틀어박히고 미움을 더욱 크게 하였습니다. 주님, 이를 회개합니다.
비록 제가 무시당하든, 서럽든, 또 다른 이들에게 불만이 있든, 이를 먼저 용납하고 용서하는 자세를 갖기를 원합니다. 미움을 쌓아두지 않고, 주님 앞에서 이를 내어놓고, 잘 풀기를 구합니다. 짜증내지 않고 먼저 사랑에 힘쓰려고 합니다. 주님, 이 죄인을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이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위의 것을 찾으라
골로새서 3:1~11(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반대로 땅의 것은 찾지 말아야 합니다. 땅의 것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 곧 우상숭배입니다. 우리가 땅의 것을 생각도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더불어 죄에 대해 죽은 것이며, 또 땅의 것을 따라가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땅의 것으로 말미암는, 분함, 노여움, 악의와 비방과 부끄러운 말, 거짓말, 그 외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대신 새 사람을 입었습니다. 곧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모든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느 인간적인 조건도 배제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어제, 오늘 음란과 정욕의 일을 행한 것을 회개하게 됩니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직도 새 사람보다 옛 사람을 좇아 살려는 마음이 있음을, 그대로 행했음을 회개합니다. 주님, 이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기를 원합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이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라
골로새서 2:6~23(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우리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만은 타협을 해서는 안 됩니다. 골로새서는 유대율법주의와 천사숭배 등등 예수님의 구원의 유일성을 의심하는 환경에 있던 성도들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을 믿는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이를 부인하는 전통과 세상 초등학문들은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권세 위의 권세시며, 성육하신 하나님의 영광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죄가 사하여졌으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께 힘입어, 믿음으로 부활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모든 것을 이기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여기서 벗어나게 하는 유혹과 헛된 것들에 굴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모든 것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꾸짖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의심하는 학자들의 주장이 세간을 휩쓸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헛되고, 스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학문적 영역을 넘어선 주장을 하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 안에서, 공동체의 전통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지거나, 특정 사람의 숭배가 이뤄져서 예수님께 돌아가야 할 구원의 집중이 흐트러지고, 사회적으로 폐악이 되어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하신 일들의 위대성을 볼 때, 거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더욱 더 뿌리를 박고,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 취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논문은 어떻게 될 지, 내 미래는 어떻게 될 지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때 다른 것을 의지하고자 하는 유혹이 많이 듭니다. 그러나 그 어떤 순간에도 제가 택할 것은 예수님께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는 것,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 제가 여기서 벗어나 오늘도 음란과 정욕을 택했음을 회개합니다. 이를 따르지 않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