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노하라!
은혜로운 사람은 거룩한 말을 진주처럼 떨어뜨린다. 사람들과 어울릴 때 선뜻 나서서 선한 대화를 이끌지 못하는 것은 신자의 잘못이다. 그런 겸양은 죄에 해당한다. 서로 자주 어울려도 서로의 영혼을 독려하지 못하면 백해무익하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께 피를 요구했고, 우리에게는 땀을 요구한다. 아무런 노력 없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노를 젓지 않아도 배가 저절로 해안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무지한 사람들은 형식적으로라도 의무를 이행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다.
지금은 싸워야 할 때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한니발(Hannibal, B.C. 247-183)이 군대를 이끌고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넘는 강행군을 시도했던 것처럼, 우리도 천국을 향해 힘껏 달려가야 한다. 단순히 기도하지 말고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약 5:16). 이것이 천국을 침노하는 것이다.
나이가 많아 지난날의 죄에 시달릴 때 천국을 향한 열정을 발휘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꽃과 같은 청춘은 마귀에게 바치고, 찌꺼기 같은 노년의 삶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 더 불경스럽고 부당한 것은 없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는 그의 제물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창 4:3). 노환에 시달릴 때까지 천국을 침노하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이 마지막 날에 우리를 정죄할 것이다. 은혜의 수단을 활용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도 않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왜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 맡기지 않았느냐? 왜 내가 준 능력을 활용하지 않았느냐?”는 심문을 받게 될 것이다(마 25:27).
우리는 무엇을 위해 세상에 왔는가? 우리는 먹고 마시고 좋은 옷을 입기 위해 세상에 오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목적은 영광의 나라를 침노하기 위해서다. 육신만을 돌보는 것은 칼날을 녹슬게 놔두고 칼집만 손질하는 것과 같고, 불이 났을 때 세간만 구하고 자녀는 타 죽게 놔두는 것과 같다. 상인은 온 세상에 상품을 보내 장사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영적 장사(곧 그분을 섬기고 우리의 영혼을 구하는 일)를 하게 하시기 위해서다.
다시 말하건대, 불신앙을 경계하라. 불신앙은 거룩한 열정을 앗아 간다. 열왕기상 13장 4절은 여로보암의 손이 말라 버렸다고 말한다. 불신앙은 영혼의 손을 마르게 해 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불신앙은 마귀에게 큰 친절을 베푼다. 불신앙은 마귀로 우리를 미혹하게 해 일할 수 없게 만든다. 이 죄를 경계하고 약속의 말씀을 믿으라.
제롬은 “내 부모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라고 나를 설득하거나 내 아내가 나를 달콤한 포옹으로 만류하더라도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께 나가겠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 천국을 향한 우리의 걸음을 방해한다면 그들을 뛰어넘거나 밟고 지나가야 한다.
신자는 기도로 날마다 영혼의 태엽을 감아야 한다. 기도는 그리스도로부터 능력을 받는 통로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임하면 영혼은 일하기 시작한다. 아침 햇살이 방 안에 하루 종일 온기를 유지해 주는 것처럼, 기도는 은혜로운 심령 상태를 유지해 준다. 기도를 등한시하거나 기도의 열기가 줄어들면 거룩한 열정이 차츰 사라진다.
하박국 선지자는 파수하는 곳에 섰다(합 2:1). 신자가 활력이 없는 이유는 깨어 경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수가 자신을 어떻게 지켜보고 있는지 알아야만 그에게 힘껏 저항할 수 있다.
집에 불이 없으면 이웃의 화로에서 불을 빌려와 불씨를 살리는 것처럼, 경건한 자들과 자주 어울리면 그들로부터 신앙의 열정과 활력을 얻을 수 있다. 시편 119편 63절은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연약한 신자들이여, 믿음을 아예 포기하지 않은 이상, 절대 낙심하지 말라. 심령이 죽어 있는 상태일 때는 우리의 대제사장, 곧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기꺼이 도움을 베풀 능력을 지니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이유는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신자들은 하나님께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는다. 신자의 마음에 계신 성령께서는 저당물이 아닌 보증금과 같으시다. 저당물은 언제라도 다시 찾아갈 수 있지만, 보증금은 원금의 일부로 그대로 남아 있다.
하나님께 가까이하려면 우리의 부족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곧 그분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탕자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아버지에게 가까이 나아갔다(눅 15장)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자. 사랑이 향하는 곳에 마음도 따라간다. 하나님을 우리를 기쁘게 하는 보화처럼 생각하면 마음이 그분께로 이끌릴 것이다. 노예적인 두려움은 영혼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거룩한 사랑은 그분께로 날아가게 만든다.
-알라딘 eBook <천국을 침노하라> (토마스 왓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