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선에 대한 생각
이번 대선 판세를 잘못 읽으면 안 되는 게, 지금의 정치적 경합 구도는 정당 정치 vs 이전까지의 비정당정치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 눈에 이게 팬클럽처럼 보인다는 것은, 여기에 부가되어 색이 칠해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부채의식 또는 죄책감’만 읽고 있기 때문이다. 아 물론 감성적으로 문재인 후보의 스타일, 외모를 좋아하는 분들도 많다.
참고로 지난 총선 이후 더불어민주당은 전국 정당에 가까운 유일한 정당이다. 샤츠슈나이더의 정당정치에 제일 가깝게 부합하는,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대중 정당인 셈이다. 재미있게도, 안철수의 새정치 타이틀이 붙을만한 정당이며, 이것은 묘하게도 넷상의 문재인 대표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모두가 잘 부각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지역주의, 지역감정 역시, 기존의 계파 중심 정당구조와도 엮여 있는데, 계파를 지지하는 지역유지와 결탁하였고, 야당은 국가권력을 향한 의지를 상실하고 여당과 타협하는 수준에서 지역의 맹주에 안주하게 된다. 또 지역 유지들은 지방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차지하고, 온갖 비리와 범죄를 묵인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벌어졌던 게 미국에서는, 링컨의 노예주 개조가 실패한 19세기 말의 공화당-민주당의 상황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철저히 예전 노예주의 입장을 대변했고, 당시 남부에서의 흑인들의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 수준이었다. 우리나라도, 민주당이 두 번에 걸쳐 정권 획득을 실패했을 때, 지역에서 흉흉한 일들이 많았다. 신안노예 사건 같은 일은 단순히 그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정권 획득을 포기하고 지역정당으로 타협한 한 정당의 우울한 그림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역정당이길 거부하고, 당당하게 대권에 도전했을 때, 여러 한계점에도 그 정당은 생명을 가질 수 있었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위대했던 점은 대권에 도전하였고, 그것이 평민당이나 신민당이나 단순히 지역 정당으로서만 남지 않게 했던 것이다. 일단 기존 권력에 도전하면서, 지역에 국한된 모습은 많이 희석될 수 있었다. 이들의 카리스마적인 정치력은, 지역유지와 결탁된 계파들이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카리스마적 정치인들도 기존 정당의 본질 자체는 바꾸지 못했다. 평민당이나 신민당이나, 호남 또는 부산-경남의 지역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놀라운 대중적 인기를 누린 노무현 대통령조차 자기가 속한 정당과 대립관계에 있었고, 새로운 정당을 만들었으나 덩치만 컸지 구심점이 없는 그런 당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 후보가 재조성한 더불어민주당은 계파들이, 카리스마적인 한 정치인에 의해 제어되는 것이 아니라, 권리당원들이 통제하는 형태로 시스템을 바꿔버렸다. 그러니깐 중견 정치인조차 공천권을 함부로 자기 계파에 나눌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권리당원들과 직간접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이 전국, 특히 수도권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으며, 자발적 참여와 적극성을 강하게 띄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촛불집회와 탄핵 때 온-오프라인에서 박근혜 정권을 궁지로 몰아넣은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기존의 정치 문법에 익숙한 정당들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사람들을 친문 패권이나 문빠로 몰아붙이는 것은 참으로 그 본질을 잊고 있는 셈이다.
촛불집회와 탄핵에서 드러났듯이, 박근혜 정권을 궁지로 몰아 붙일 정도로, 강력한 원동력을 가졌으며, 온-오프라인을 아우른 집단적인 지식을 가졌고, 지역의 장벽을 넘어버린, 새로운 정치집단과 손을 잡은, 시스템적으로 기존의 정치 정당을 넘어선 새로운 전국적인 대중정당의 존재는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기존 정당들이 당황해 하는 것은 이 점이다. 박근혜 탄핵에서 드러난 그 강력한 힘이 자신들에게 닥치니 대응을 못 하는 것이다. 비난할 것이 아니라,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지부터 생각하는 게 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