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 혹은 회개의 두 양상’, 유태화 교수
유태화 교수님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taewha.yoo/) 참조
회심 혹은 회개라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이룬다는 사실을 앞글에서 언급했다. 하지만 기독교 내부로 들어와서 보게 되면 회심 혹은 회개라는 것이 두 다른 맥락으로 확장되어 이해된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된다. 그 하나는 율법적인 회심 혹은 회개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적인 회심 혹은 회개이다. 율법적인 회심은 중생의 조건으로서 기능하는 것이고, 복음적인 회심은 중생의 결과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다. 복음적인 회심에 대하여는 앞의 글(중생의 첫 열매가 왜 회심과 믿음일까?)에서 이미 어느 정도 거론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전자에 대하여 그 개략적인 이야기만 거론하도록 하겠다.
율법적인 회심은 율법과 복음의 극단적인 대조에서 기인한다. 기독교 역사상 율법과 복음의 가장 극단적인 대조는 마르시온(Marcion)에게서 비롯되는데, 알리스터 맥그로스(Alister McGrawth)에 따르면 그런 전통을 수용한 종교개혁가가 있는데 바로 그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라고 한다. 루터에 따르면, 율법은 신학적인 용도, 그러니까 몽학선생적인 용도로만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은 인간이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는데 얼마나 무능하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따라서 몽학선생으로서 율법 앞에 선 인간은 자신의 죄를 직면하고, 동시에 사망의 운명에 처한 자신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복음 안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소개하게 되는데 이 때 그리스도는 정확히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정확하게 성취하는 분으로 등장하고,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율법의 모든 정죄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을 끝장내는 분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환언하자면, 그리스도는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을 궁극적으로 완성하여 폐기하는 분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몽학선생으로서 율법과 그리스도는 정확하게 대척점에 서 있게 된다. 동시에 극명하게 자신의 역할을 성취한다. “정죄”와 그 “정죄를 무화(無化)시키는 일”말이다.
이 긴장이 기독교의 핵심을 구성한다고 믿었고, 이 긴장은 모든 죄인에게 제시되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실제로 죄의 굴레에 에워 쌓인 인간에게 이 두 긴장을 간직한 기독교적 메시지가 선포된다(소명). 그리고 선행하는 성령의 은혜가 역사한다(선행적 은총-prevenient grace). 성령은 죄인의 잠자던 인식이 살아나도록 은혜를 베풀되, 이 은혜는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역사한다. 따라서 인간은 몽학선생으로서 율법 앞에서 자신의 죄를 직면하게 되고, 사망에 매여 종노릇 하고 있는 모습을 인식하게 된다. 동시에 복음 안에 계시된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정죄도 사망의 운명도 벗겨진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된다.
정확히 이 인식의 지점에서 성령은 뒤로 물러나고, 인식의 주체로서 인간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 죄에서 돌아서는 인격적인 회심을 하게 되고,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약속된 구원의 약속을 굳게 믿고 붙잡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격적인 회심이며 동시에 믿음이다. 이 회심과 믿음이 조건이 되어서, 죽음에서 생명에로 넘어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중생이다. 그러니까 회심과 믿음은 중생을 이루는 본질적인 요소로 기능하게 된다. 환언하여 만일 인간이 회심과 믿음이라는 인격적인 자기 결정을 하지 않는다면 중생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회심과 믿음은 중생의 본질적인 조건으로 기능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소명-회심과 믿음-중생-성화라는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을 이루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조건으로서 기능하는 회심과 믿음이 중생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율법적인 회심이라고 부른다. 중요한 것은 율법적인 회심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계속해서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구원의 서정에서 이런 생각을 반영하는 핵심적 국면이 성화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쉽게 말하여 성화의 삶을 살아갈 때도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은 지속적으로 선포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선포되는 율법을 인하여 자신의 죄인됨을 반복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회개와 함께 그리스도 안으로 회귀하게 된다. 이 삶을 반복해서 살아가게 되면, 성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화는 반복적으로 죄를 인식하고 그리스도에게로 귀의하여 그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이다. 얼른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지게 되었을 때를 상정해놓고 그 구조 안에서 성화를 생각하게 되면 아주 이상한 지점에 이르게 된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데, 그 발이 미끄러져 죄를 짓고 타락에 떨어졌다면, 이제 그에게 몽학선생으로서 율법과 그 율법을 완성하고 폐기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새롭게 자신을 발견하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이 선포되는 기독교적 메시지의 핵심을 사용하여 은혜를 베풂으로써 타락한 인간은 다시 새롭게 회개와 믿음이라는 반응을 구체적으로 보여야만 한다. 이것은 중생에 이를 때와 동일한 조건에서 일어나는 인격적인 반응이다. 이 인격적인 반응이 수반되어야만 중생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회개와 믿음을 보이지 않으면, 중생은 취소되는 것이다. 일시적인 타락이 영원한 타락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회개는 율법적인 조건으로 기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복음적 회개의 또 하나의 특징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한다. 율법적인 회개에서는 은혜의 조건성이 핵심을 이룬다면, 복음적인 회개에서는 은혜의 불가항력성이 핵심을 이룬다. 율법적인 회개를 말하는 경우나 복음적인 회개를 말하는 경우나, 모두가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사실은 중생한 그리스도인도 죄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성령이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여 지은 죄를 일깨운다는 사실도 동일하다. 하지만 이 성령의 사역의 성격이 율법적인 회개와 복음적인 회개에서 근원적인 차이를 일으킨다. 율법적인 회개에 대하여는 상기했으므로, 복음적인 회개에 대해서만 설명하도록 한다. 복음적인 회개에서는 성령이 두 가지 차이를 일으키는데, 그 하나는 성령이 사용하는 은혜의 수단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베푸시는 은혜의 성격에 대한 것이다.
은혜의 수단인 하나님의 말씀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경우, 즉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경우, 몽학선생으로서의 율법이 아닌 규범으로서의 율법이 작동하게 되는데, 규범으로서의 율법은 그리스도 예수와 정상적인 관계에 있는지 비정상적인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능을 수행하며, 사망에 이르는 정죄를 일삼지는 안는다. 이 때 성령이 규범적인 율법을 사용하여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이 비정상적인 상황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데, 일깨우는 정도가 두 다른 단계를 이룰 수 있다. 하나는 인격적인 회개를 통하여 돌아오도록 성령이 감동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자의 방식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 인간의 의지를 어거하여 순종하도록 바꾸는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개입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를 어거하는 방식은,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죄를 인식할 수 있는 환경적인 것들을 강제함으로써, 성령이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돈줄을 옥죄이기도 하고, 건강을 잃게도 하고, 주변의 인적구성원을 동원하기도 한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도록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격적인 회개를 하도록, 그래서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연합에 이르도록 일깨운다는 말이다. 물론 이 일은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하시는 일이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라고 언급한다(히 12:7-9).
비록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누구나 다 범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삶의 질곡에서부터 인격적인 회개를 이루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며, 또한 참 귀중한 일이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규범적 용도로서 율법, 곧 십계명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를 정확히 보여줄 때, 그 안내를 따라서 자신의 삶의 자리를 교정하고, 삶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예수와의 인격적인 연합을 더욱 공교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친 백성의 길을 새롭게 결단해야 한다. 간혹 삶의 중심에서 멀어져서 십계명이 열어 보여주는 삶을 지향(志向)하지 못할 때,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함으로써 다시 중심으로 돌아서는 일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특별히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를 힘쓰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본질적인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이 자녀의 길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유한 아들이 걸어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