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24일 / kestrel / 0 Comments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디도서 2:1~14(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사도 바울은 그레데 교회를 위해 파송된 디도에게 여러 권면을 합니다. 이 바울의 권면은 우리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도 여러 직분을 담당할 수도 있고, 또 그 권면에서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직분 맡은 사람은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며, 여러가지로 권면을 하고, 범사에 본을 보여, 부패하지 않고, 단정하며, 선한 일과 바른 말을 해야 합니다. 또한 늙은 남자는 절제, 경건, 신중함을 가지고, 믿음, 사랑, 인내에 온전해야 하고, 늙은 여자는 행실이 거룩하고, 선한 것을 가르치며, 잘 교훈해야 합니다. 또, 젊은 여자들은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또한 젊은 남자들은 신중함, 곧 자기를 잘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종은 자기 상전들에 대해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화가 난다고 함부로 거슬러 말해서는 안 됩니다. 상전의 물건을 훔쳐서도 안 될 것입니다. 신실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양성평등의 시대에 이게 왠 말이냐, 아니면 요즘 같은 88만원 세대에 너무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당대 그레데인들은 거짓말을 잘하고, 악한 일을 자주하며, 세상 쾌락에 탐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술마시고, 가정을 돌보지 않고, 상전의 것을 가로채는 일이 허다한 세대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이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의 권면이 가진 목적은 이것입니다. 곧 선한 행실로, 대적하는 자들이 빌미를 얻어 모함하는 입을 막고,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본질입니다. 우리가 선한 행실로 악한 자들의 입을 막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빛나게 하는 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복음의 의미를 상기시켜줍니다. 오늘 요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그렇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도무지 구원받지 못할 죄인 중에 괴수든, 복음을 믿는 자에게는 값없이 구원이 주어집니다. 14절을 또한 보십시오.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그 끔찍한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이뤄진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우리를 깨끗케 하사 거룩하신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게 걸맞게 이전 행실을 버리고 선한 일을 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런 우리가 되도록,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금생에 있어서, 우리가 경건하지 않은 것, 이 세상을 정욕을 버리게 하시며,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게 하십니다(13). 또한 내생에 우리에게 다가올 복스러운 소망과,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도록 하셨습니다(14).
이렇듯 우리는 이전의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절제하고, 때로는 남편과 세상 상전을 비롯한 다른 이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우리가 비굴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악한 자들의 입을 막고 선한 행실로 하나님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숱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또 얼마전 청소년 부흥사 성추행 기사 같이, 우리 안의 수많은 문제가 드러나 더더욱 고개를 들 수 없는 지경입니다. 이런 세태 가운데 우리가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것처럼 선한 말과 선한 행실과 낮아져 섬겨야 하겠습니다. 악한 자들의 입을 막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의 은혜를 드러내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빛나게 하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가 기도하고 개인 기도하시겠습니다.
2017년 1월 4일 / kestrel / 0 Comments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민수기 23:1~30(20)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고 이를 위해 영험하다는 복술사 발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인 바알 산당에서 발람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진을 바라보고 저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순간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임하시고 그의 입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발람은 하나님께서 저주하지 않은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은 자를 어찌 저주하겠냐며, 이스라엘 백성을 오히려 축복합니다. 심지어 발람은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고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원하노라”하며, 오히려 이스라엘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발락은 화가 났지만, 발람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니 어쩔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발락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꾀를 내서 발람을 이스라엘 진영 끝만 보이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제사를 드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게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다시 임하사 말씀을 주십니다. 이 때 발람에게 주신 말씀이 어떻습니까? 먼저 하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밝히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19).” 이 말씀은 하나님이 지극히 신실하신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 입으로 두 말 하고, 후회하고 번복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 없이 지극히 신실하셔서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입술을 통해 이스라엘을 축복합니다. 20절 요절 말씀을 우리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20).” 발람은 자신이 아무리 저주한다고 해서, 이것이 이뤄지지 않을 것을 압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신실하시고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심을, 하나님의 임하심을 통해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또 어떤 분이십니까? 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허물과 반역도 용서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셔서 왕이 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들소처럼 어떤 것도 막을 수 없고, 오히려 사자와 같아서 모든 적을 누르고 이길 것입니다. 발락은 이 축복을 막으려고 했지만, 결코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서 저는 우리와 임마누엘 하시는, 우리의 왕 되신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요즘, 하나님을 믿는 게 내게 무슨 힘이 되느냐 하는 시험과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회사 지원서를 내는데, 나는 실력도 모자라고, 나이도 많은데, 이래서 뭐가 되겠냐는 생각이 듭니다. 더 힘든 것은 지난 시절 내가 하나님께 행한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거절당하고, 징벌을 받을 것이라는 정죄 의식이 들 때입니다. 이런 마음의 시험이 들 때마다, 낙담이 크게 됩니다. 나는 망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며, 나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은 신실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나의 허물과 반역에도 오직 주 예수님의 희생만으로 저는 저 축복받는 새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걸로 죄사함의 은혜가 임합니다. 또 주께서 함께 하사 왕 되심으로 저를 강하게 하시고, 이 모든 절망과 어려움 속에서도 능히 이 죄인을 건져내실 것을 믿습니다. 어누 누가 저주를 한다 한들, 마귀 권세가 훼방을 놓는 들, 이 사랑에서 누가 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내 삶의 모든 것에서 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 견고히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축복에 의지하여 기도하고, 나아가 양들에게 이 축복을 전하는 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원수의 입술을 통해서도 오히려 우리를 축복하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016년 7월 20일 / kestrel / 0 Comments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마가복음 12:38~44(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보실 때, 그 겉을 보시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 안에 믿음과 사랑이 있는 지를 보십니다. 오늘 말씀을 이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 38,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을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 이것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닙니다. 또 40절을 보면, 이들은 길게 기도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길게 기도하는 게 나쁩니까? 저는 새벽기도 시간에 길게 기도하시는 목자님이 많이 부럽습니다. 오히려 길게 기도하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들의 겉모습 자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동기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외식하고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었습니다. 선비들이 긴 도포자락을 입고 다니고, 귀족들이 까다로운 매너를 고집하는 것처럼, 그들 또한 고귀하고 높아 보이고자 하는 욕구에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기에는 거추장스러운 긴 옷을 입고, 자신의 율법 지식을 과시하면서 일부러 사람 많은 시장에서 문안을 받고자 하였으며, 회당과 잔치 자리에서 윗 자리에 앉고자 하였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는 본인이 거룩해 보이려고, 일부러 길게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과부들에게 접근해서, 자신들의 권위를 이용해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일도 벌였습니다. 그들의 교만함과 위선은 정말로 지독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삼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 그들이 받을 하나님의 판결을 통해 가중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겸손해져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을 자랑하며, 겸손하신 예수님을 닮아 섬기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본문 4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헌금함에 마주하여 앉으셨습니다. 당시 성전에 있었던 이 헌금함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리들이 헌금함에 어떻게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습니다. 먼저는 여러 부자들이 넣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돈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수많은 동전이 쨍그랑쨍그랑 소리를 내며 헌금함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들과 대조적인 초라한 옷을 입은 한 과부가 고작 한 고트란드 동전을 부끄러워 하며, 살며시 헌금함에 집어넣었습니다. 한 고트란드는 두 렙돈으로, 렙돈은 오늘날 시세로 오백원 아래입니다. 그러니깐 1000원 정도의 돈을 넣은 것이었습니다. 정말 적은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집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저 가난한 과부를 가리키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제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1000원짜리가 큽니까. 저 앞에 부자는 수백만원을 넣던데요.’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다르셨습니다. 본문 4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44).” 처음 말씀드린대로, 예수님은 겉모습으로 그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부자들은 부유한 중에 자신의 체면을 위해, 자신이 손해보지 않을 정도로 헌금을 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의 헌금도 귀했지만, 그들의 총 부에 대해서는 적은 비율만 넣은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과부의 두 렙돈은 1000원도 안 되는 적은 돈이었지만, 그녀의 생활비였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기부 이야기 하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더 불쌍해.” 또는 다른 사람들이 이럴 때, “너부터 챙겨”라는 걱정 반, 핀잔 반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물론, 나도 잘 챙기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당시 불쌍한 사람이라면 투 톱으로 ‘고아와 과부’를 뽑았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과부의 전 재산이 1000원이었는데, 그녀는 불쌍한 이들을 위해 전부 내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과 사랑과 헌신과 희생을 기뻐하시고 과부의 헌금을 영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계명을 모두 지켰다는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도, 자기 재산을 모두 가난한 자에게 내어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은 안색이 변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부의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적은 것을 가지고 안달복달 하는 것이든, 큰 것을 가지고 안달복달하는 것이든, 결국 같은 게 아니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적을지라도, 이것을 예수님께 내어놓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적다고 부끄러워 하지도 말고, 적다고 아까워하지 말고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크기가 아닙니다. 마음입니다. 저도 근래 대학원 공부가 잘 안 되고, 또 조교 일도 그만 두었기 때문에, 내가 불쌍하고 급하니 이웃과 형제 자매를 위해 내어놓을 시간과 비용은 없다고 인색하게 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서, 내가 가진 것이 적더라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움켜진 손을 펴고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작지만, 시간을 내어 캠퍼스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또 적더라도 물질을 들여 하나님의 역사에도 동참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모두에게 내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예수님을 볻받아, 2학기 예수님의 이 사랑을 본받고 실천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럼 오늘 요절 말씀 읽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