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작전권 논의에 대한 우려

한국이 전시작전권도 얻을 경우 과연 만족할만한 대북 대응을 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그게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평시작전권이 한국에 있었던, 연평도 포격 사건의 경우, 한국은 그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 강경과 온건 모두의 의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미국의 뜻에 따라 더 강경한 대응은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제2 연평해전의 경우도, 많은 사상자를 낳았던 것에는 NLL을 넘어온 북한 경비정에 대한 교전수칙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교전수칙은 한국군이 자의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미연합사를 통해 이뤄지고 있으며, 따라서 평시작전권을 가진 지금에도 우리나라가 북한에 대해 자의적으로 무력 도발에 대한 대응을 행사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전시작전권이 주어진다고 할 지라도, 북한과 휴전 협정을 맺은 당사자는 대한민국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즉, 이전까지 휴전 협정에 의해 이뤄진 남북관계의 틀에서, 조약상 한국 정부와 한국군의 존재가 빠져 있었고, 결국 새로운 남북 관계의 틀이 잡히지 않는 이상, 전시작전권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한미연합사에 의해, 교전수칙이 제정되는 한, 남북의 대치 상황에서의 전시작전권이란 것은 일반 국민들의 눈에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오기는 힘들 것이다.

따라서 현재 전시작전권을 받고 안 받고의 논의보다, 휴전 협정 이래의 남북 관계의 틀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현 상황을 인지하고, 어떻게 남북 관계를 새롭게 가져갈 지에 대한 새로운 틀부터 집중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오늘 전시작전권 인수에 대한 찬반 여론은 결국 이념과 정파 싸움으로 얼룩져가는 모양새를 띠고 있고, 그러나 본질은 우리가 남북 관계를 어떻게 가지고 갈 것인가가 아닐까?

침노하라!

은혜로운 사람은 거룩한 말을 진주처럼 떨어뜨린다. 사람들과 어울릴 때 선뜻 나서서 선한 대화를 이끌지 못하는 것은 신자의 잘못이다. 그런 겸양은 죄에 해당한다. 서로 자주 어울려도 서로의 영혼을 독려하지 못하면 백해무익하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께 피를 요구했고, 우리에게는 땀을 요구한다. 아무런 노력 없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노를 젓지 않아도 배가 저절로 해안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무지한 사람들은 형식적으로라도 의무를 이행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다.

지금은 싸워야 할 때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한니발(Hannibal, B.C. 247-183)이 군대를 이끌고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넘는 강행군을 시도했던 것처럼, 우리도 천국을 향해 힘껏 달려가야 한다. 단순히 기도하지 말고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약 5:16). 이것이 천국을 침노하는 것이다.

나이가 많아 지난날의 죄에 시달릴 때 천국을 향한 열정을 발휘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꽃과 같은 청춘은 마귀에게 바치고, 찌꺼기 같은 노년의 삶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 더 불경스럽고 부당한 것은 없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는 그의 제물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창 4:3). 노환에 시달릴 때까지 천국을 침노하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이 마지막 날에 우리를 정죄할 것이다. 은혜의 수단을 활용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도 않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왜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 맡기지 않았느냐? 왜 내가 준 능력을 활용하지 않았느냐?”는 심문을 받게 될 것이다(마 25:27).

우리는 무엇을 위해 세상에 왔는가? 우리는 먹고 마시고 좋은 옷을 입기 위해 세상에 오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목적은 영광의 나라를 침노하기 위해서다. 육신만을 돌보는 것은 칼날을 녹슬게 놔두고 칼집만 손질하는 것과 같고, 불이 났을 때 세간만 구하고 자녀는 타 죽게 놔두는 것과 같다. 상인은 온 세상에 상품을 보내 장사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영적 장사(곧 그분을 섬기고 우리의 영혼을 구하는 일)를 하게 하시기 위해서다.

다시 말하건대, 불신앙을 경계하라. 불신앙은 거룩한 열정을 앗아 간다. 열왕기상 13장 4절은 여로보암의 손이 말라 버렸다고 말한다. 불신앙은 영혼의 손을 마르게 해 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불신앙은 마귀에게 큰 친절을 베푼다. 불신앙은 마귀로 우리를 미혹하게 해 일할 수 없게 만든다. 이 죄를 경계하고 약속의 말씀을 믿으라.

제롬은 “내 부모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라고 나를 설득하거나 내 아내가 나를 달콤한 포옹으로 만류하더라도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께 나가겠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 천국을 향한 우리의 걸음을 방해한다면 그들을 뛰어넘거나 밟고 지나가야 한다.

신자는 기도로 날마다 영혼의 태엽을 감아야 한다. 기도는 그리스도로부터 능력을 받는 통로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임하면 영혼은 일하기 시작한다. 아침 햇살이 방 안에 하루 종일 온기를 유지해 주는 것처럼, 기도는 은혜로운 심령 상태를 유지해 준다. 기도를 등한시하거나 기도의 열기가 줄어들면 거룩한 열정이 차츰 사라진다.

하박국 선지자는 파수하는 곳에 섰다(합 2:1). 신자가 활력이 없는 이유는 깨어 경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수가 자신을 어떻게 지켜보고 있는지 알아야만 그에게 힘껏 저항할 수 있다.

집에 불이 없으면 이웃의 화로에서 불을 빌려와 불씨를 살리는 것처럼, 경건한 자들과 자주 어울리면 그들로부터 신앙의 열정과 활력을 얻을 수 있다. 시편 119편 63절은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연약한 신자들이여, 믿음을 아예 포기하지 않은 이상, 절대 낙심하지 말라. 심령이 죽어 있는 상태일 때는 우리의 대제사장, 곧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기꺼이 도움을 베풀 능력을 지니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이유는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신자들은 하나님께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는다. 신자의 마음에 계신 성령께서는 저당물이 아닌 보증금과 같으시다. 저당물은 언제라도 다시 찾아갈 수 있지만, 보증금은 원금의 일부로 그대로 남아 있다.

하나님께 가까이하려면 우리의 부족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곧 그분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탕자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아버지에게 가까이 나아갔다(눅 15장)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자. 사랑이 향하는 곳에 마음도 따라간다. 하나님을 우리를 기쁘게 하는 보화처럼 생각하면 마음이 그분께로 이끌릴 것이다. 노예적인 두려움은 영혼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거룩한 사랑은 그분께로 날아가게 만든다.

-알라딘 eBook <천국을 침노하라> (토마스 왓슨) 중에서

사이버디터런스에 대한 글을 시작하며

사이버디터런스란 무엇인가?
사이버디터런스를 달성할 수 있는 조건
한국에서 사이버디터런스는 실현가능한가 그리고 유용한가?
대안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