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의 첫 열매가 왜 회심과 믿음일까?’, 백석대 유태화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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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acebook.com/taewha.yoo/ 참조

중생은 사도 요한의 해석에 따르면 성령께서 물로 씻듯 인간의 마음에서 그 부패성을 씻어내고, 새롭게 한 일로 보아야 한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본성의 부패와 오염을 경험하면서 지정의에 심각한 결함을 갖게 된 인간에게 복음이 들려질 때 성령이 내적으로 인간을 소명하는데, 이 내적인 소명은 인간이 항거하지 않고 복음 안에 계시된 그리스도에게로 인격적인 전환을 이루게끔 하는 성령의 사역이 그 핵심을 이룬다고 할 것이다. 중생은 인간의 지성을 밝혀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게 하는 사역이면서, 그 사실에 깊은 감동과 함께 마음으로 공감을 이루게 만드는 사역이기도 하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삶의 태도를 바꾸는 행위를 내포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따라서 중생한 인간은 성령의 역사를 좇아 그리스도와의 깊은 인격적인 연합을 이루게 된다. 소위 말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게 되는 일이 성령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을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unio mystica cum Christo)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신비적(mystica)이라는 말은 “성령을 통하여”라는 뜻이다. 이렇게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인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나는 두 가지 뚜렷한 인격적인 반응은 회심과 믿음이다.

중생의 결과가 왜 회심과 믿음일까? 조직신학, 특별히 구원론을 오랫동안 강의해오면서 갖게 된 깨달음은 이것이다. 이 두 반응이 나타나는 핵심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 때문이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이후 기독교가 견지해온 구속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파악하는데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랑이면서 동시에 공의로우신 분이다. 아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범죄한 후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되어야만 했으나, 아담에게 속한 그 누구도 이 조건을 만족케 할 존재가 없었고, 바로 그런 이유로 성자의 성육신이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해야만 했는데, 그 공의는 무엇보다도 죄에 대한 것으로 표현되어야 했다. 그러한 이유로 그리스도는 아담의 자손의 죄를 대신 걸머지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대신 걸머지고 하나님의 심판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또한 아담과 달리 아담의 자리에서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데, 그것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삶의 특징이었다. 달리 말하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유일한 하나님임을 신뢰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이었다. 그 깊은 신뢰로부터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으며, 이 세상의 피조물 가운데 하나로 하나님을 평가절하하지 않으며,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고, 자신의 창조주로 인하여 쉼을 누리며,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이웃을 제 몸처럼 대하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 예수는 참 인류의 새로운 머리로서,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이웃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분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바로 이 사랑의 삶을 살아낸 분으로서 십자가를 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삶인지를 몸소 보여주었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이유로 인하여 그리스도 예수와의 신비적인 연합인, 중생에 이르게 되면, 그리스도인이 회심과 믿음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조금 쉽게 말하자면,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의 깊은 연합을 말씀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이루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알아가게 되기에, 죄로부터의 인격적인 돌이킴을 보이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부르시고 중생에 참여하게 하시는 일은, 인간이 여전히 연약하고 죄인되고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서 일어난다. 죄인에게 죄를 다 씻고 오라고 말하지 않는다.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단 처리하시고, 그것에 근거하여 의로운 자로 간주하시어 당신의 자녀로 인정해주신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리스도야말로 바로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은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깊이 이해한 그리스도인은 인격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죄에 대하여 돌이키는 회심의 자리에로 나아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와 성령을 통하여 깊이 연합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헌신을 보이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리스도 예수의 삶을 깊이 묵상하면서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낸,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분임을 그리스도인이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삶의 특징을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을 통해서 깊이 체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깊은 신뢰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사신 삶 안으로 걸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삶을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게 되는데, 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장 소중하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창조와 구속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임을 명확하게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 예수와 성령을 통하여 연합된 그리스도인이 인격적인 회개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그의 삶에서 보이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인격적인 회심이 없는 그리스도 따름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인을 부르시지만, 그렇게 부름을 받은 죄인은 그리스도 예수와의 깊은 연합 가운데서 죄를 인식하고 죄를 떠나는 인격적인 결심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부르시며 용서하시되, 다시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은 금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정한 세 수 그 이상으로 토색한 삭케오를 용서하며 부르셨지만, 잘 차려진 밥상에 올라온 진미를 드시면서 누구의 고혈을 빨아 먹는 것인지 알아듣게 만드셨고, 그 결과로 인격적인 회개를 하도록 하셨다. 살인자 바울을 부르시고 구원과 이방인을 위한 귀한 직임을 맡기셨지만, 남은 생을 살아가면서 그 죄를 인한 깊은 회개가 동반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셨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과거의 삶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근거한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주와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 안에 터 잡고 형성해온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삶에서 돌이켜서 하나님 안에 깊은 신뢰를 둔 삶, 그를 신앙하는 삶을 살아가가는 전향적인 인간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고,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주요 또한 온전케 하시는 이인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와의 깊은 인격적인 교제를 이루면서 그분의 삶 안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은혜의 수단인 하나님의 말씀을 잘 활용하면서 부지런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삶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파악해야 한다. 성령의 깊은 감동과 함께 그의 인도를 기뻐하며 그 삶이 자신의 삶 가운데 형성되기를 위하여 애를 써야 한다. 피 흘리기까지 옛 삶의 관성에 저항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를 죽여야 한다. 이런 옛 습관을 끊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마귀와 그의 졸개들의 미혹을 딛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밝히 드러난 삶, 곧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빚쟁이 혹은 그만큼의 죄를 용서받은 죄인처럼, 그 탕감받은 것, 용서받은 것, 바로 그 근원적인 경험에서부터 일어나는 일이다. 그 은혜에 감사하는 근원적인 삶의 자리를 잃지 않으면서, 아니 더 적극적으로 바로 그 은혜의 자리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는 삶이다. 회심과 믿음은 용서와 은혜라는 그 근원적인 나무에서 필연적으로 맺힐 수밖에 없는 열매인 것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어떤 의미에서 회개의 의무를 지닌 특이한 공동체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공동체의 구성원은 누구도 상대방의 멱살을 거머쥐거나 구타하면서 회개를 요청할 수 없으나, 누구나 스스로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의 의무를 걸머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때, 그를 위하여 기도할 의무를 걸머지고 있을 뿐이다. 그의 죄로 인한 어려움을 공유하며 함께 애통해 할 수는 있으나, 끝까지 그를 놓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 마땅히 회개해야 할 중대한 죄를 고백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을 때,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권면했듯이 회개를 기대하면서 그의 영혼을 사탄에게 내어주는 일이 있을지라도 말이다.

청교도들의 준비론, 코 해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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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parationism As Taught By The Puritans, Cor Harinck
청교도들의 준비론, 코 해링크

세례요한은 네가 누구냐는 질문에 “나는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대로 주의 길을 곧게 하려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요한복음 1:23) 라고 대답하였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심을 알기 전에 먼저 회개하라고 설교하였다. 준비론에 대한 청교도 교리는 세례 요한의 이런 증거에 기초하고 있다. 청교도들은 이것이 설교의 바른 방법이라고 믿었다. 청교도들은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영혼이 준비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어떤 죄인도 무의식적으로 믿지 않는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성령이 마음속에 역사하신 결과이다.

청교도의 준비론에 대한 정의

(준비론에 대한) 두 가지 오해를 먼저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 청교도들이 중생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준비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죄인이 스스로 중생을 위하여 준비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위하여 스스로 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청교도 전통에서 낯선 것이다.

중생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지속된 개혁”의 화란 신학자들과 청교도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화란 신학자들은 중생을 은혜의 생명이 시작되는 시점, 즉 영적 각성과 확신이 시작되는 첫 순간으로 정의한다. 화란 신학자들은 신적 관점에서 중생을 본 것이다. 영국 신학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최초의 믿음의 행위 시에 중생이 일어난다고 상정한다. 영국 신학자들은 (중생을) 사람의 관점에서 보고 그리스도인은 죄인이 처음 믿을 때 태어난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영국 신학자들은 중생을 위한 준비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위한 준비로 본다.

청교도들이 중생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를 말할 때, 사람이 스스로 준비할 수 있음을 의미한 것이 아니다. 그 반대이다. 청교도들에게 “준비”라는 말은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일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전적으로 부적합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일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을 위하여 준비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선포를 시작하실 때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복음 1:15)고 외치셨다. 이 선포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의 메시지를 요약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며 내적인 변화를 체험해야 하고 그리스도 안의 구원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 또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사람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이것이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얻도록 (사람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방식이다.

이것이 개혁신학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위한 마음의 준비에 대한 교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최초로 진술하였고 나중에 더 풍부하게 발전되었다. 우리는 율법과 복음에 대한 마틴 루터의 가르침에서 이 사실을 발견한다. 루터는 하나님은 믿음으로 죄인을 의롭다하시는 일을 하시기 전에 율법으로 먼저 죄인의 마음을 겸비하게 하신다고 가르친다. 칼빈도 사람이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고 전적으로 겸비해지지지 않는다면 구원의 길이 열리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율법은 은혜를 위하여 죄인을 준비시킨다고 강조한다. 루터와 칼빈을 통하여 어거스틴과 (영국의) 청교도들 그리고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사이에 연관성이 나타난다. 그런데 왜 청교도들은 그렇게 명백하게 준비론에 집중하였을까?

먼저, 주된 이유는 청교도들이 회개와 믿음에 대한 (사람의) 의무를 강조하여 설교한다는 사실에 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영원히 멸망한다고 끊임없이 회중들에게 설교하였다.(사도행전 20:21) 청교도들은 회개의 필요성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속적으로 설교하며 하나님이 그것을 요구하신다고 설교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라는 가르침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신다. 청교도들은 요한1서 3:23의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고 요한복음 6:29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는 말씀이 이런 가르침을 지지한다고 주장한다.

청교도들은 이런 설교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주와 왕으로 받아들이도록,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의 양심에 촉구한다고 믿는다.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 (마가복음 16:16)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말씀을 들고도 회개하지도 믿지도 않은 모든 사람들을 문책하시는 날이 올 것이다.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참된 신자들로 이루어진 교회를 세운다는 이상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런 요구를 더욱 강조하였다. 1630년에 뉴잉글랜드 설립자들은 교회의 회원권이 자기들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설명할 수 있으며 거룩한 삶에 공적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져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이것이 교회 회원이 되는 것과 식민지 정부에 참여하는 전제조건이었다.

이러한 요구로 교회의 회원들은 엄청난 부담을 가지게 되었다. “거듭나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여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가?” 이것이 문제였다. 이로 인하여 청교도들은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하는 지침을 만들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어떤 종류의 지침을 만들었는가? 청교도의 조상인 윌리엄 퍼킨스는 “자신의 영적 빈곤과 비참함, 특별히 자신에게 내재하는 부패함, 불신앙, 교만 그리고 자기 사랑을 깨닫도록 애를 쓰라, 그러면 자신의 비참함을 씻기 위하여 예수님의 핏방울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며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게 (회심을) 촉구하였다. 각주1 퍼킨스의 영적 상속자들은 이것을 더욱 풍부하게 발전시켰다. 심지어 그들은 일련의 지침서를 만들 정도였다. (대표적인 청교도인) 자카리 크로프톤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첫 번째, 겸비한 양심으로 진리의 말씀과 은혜의 복음 아래 조심스럽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복종하라.

두 번째,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숙고하라. 하나님의 거룩하심, 능력, 의로우심, 은혜 등과 같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숙지하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존경하기 전에는 결코 죄를 떠나거나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없다.

세 번째, 심각하게 자신을 검토하라. 자신의 영혼과의 그러한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최악의 모습을 보게 되면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자신을 검토하라.

네 번째, 점점 세상과 결별하라. 참되게 회개하는 자는 세상에서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

다섯 번째, 삶이 덧없음을 생각하라. 나중에 회개할 시간이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오래살기를 바라던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최후를 맞는다.

여섯 번째, 심판의 날이 곧 닥칠 것을 엄숙하게 생각하라.

일곱 번째,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죄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 회개하는 마음과 겸비한 심령으로 찾는다면 구원은 분명히 얻을 수 있는 축복이다.

여덟 번째, 자신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피로 흠뻑 젖게 하라. 매일 골고다를 묵상하라

아홉 번째, 절박한 심정이 있으면 회개에 이르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지체하지 말라, 죄와 결별하는 것을 지체할수록 회개하기 더욱 어려워 질 것이다.

열 번째,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회개와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이것에 덧붙여 “하나님께 이런 은혜의 방편들에 복주시기를 구하라 그리하면 돌 같은 자신의 마음이 제거되고 진리 안에서 회개를 위하여 필요한 은혜를 얻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각주2 이런 방식으로, 청교도들은 듣는 자들을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청교도의 준비론의 신학적 배경

이 모든 경고와 책망에 대한 근본적인 신학은 다음과 같다.

1. 청교도들은 사람의 책임을 믿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더불어 사람의 책임을 옹호하였다. 죄인은 자신의 마음을 바꿀 수 없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바꾸시려 사용하시는 은혜의 수단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사람이 성령의 바람이 불게 할 수는 없지만 성령의 바람이 불 때 돛을 올릴 수는 있다.

2. 청교도들은 지성의 중요성을 믿었다.

청교도들은 이성적 피조물인 사람은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청교도들은 모든 은혜가 지성을 통하여 마음에 들어온다고 믿었다. 청교도들에게 마음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은 지성을 통하는 것이었다. (의지를 강조한 윌리엄 에임즈는 청교도 전통의 특징을 다소 벗어난다.) 하나님은 사람을 강제로 움직이시기 보다는 지성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에게 말씀으로 다가 오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에 권고를 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설득하시며 찾으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권유하시며 각성시키심으로 하나님을 찾게 만드신다. 코튼 매더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바꾸실 때, 하나님의 영은 이성이 없는 목석처럼 우리를 다루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사람으로 다루시며 사람에게 맞는 방법으로 우리를 이끄신다.”고 생각하였다. 각주3

3. 청교도들은 타락한 사람이 선과 악을 증거하는 양심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청교도들의 설교의 주된 목표는 양심을 각성시키는 것이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하신다고 믿었다.

성령께서는 양심을 통하여 특별히 사람의 영혼에서 죄를 깨닫도록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청중의 양심을 겨냥하여야 한다. 청중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양심을 찌르게 된다.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갈 때, 그들의 양심은 괴로움을 당하여 하나님과 직면하여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심에 권고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에 도달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4. 청교도들은 설교의 중요성을 믿었다.

성령께서는 말씀의 설교에 자신을 속박시키신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로마서 10:17)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부라고 기대하였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충성스럽게 선포하는 설교자의 소명,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종들에게 설교를 명하셨는데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교회를 모으신다.

동시에, 청교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믿었다. “설교자들은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고, 성령께서 열쇠로 문을 여신다.” 이렇게 생각하고, 청교도들은 청중들의 마음, 의지, 그리고 양심에 설교로 다가갔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마음을 조명하고 의지를 새롭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청교도들은 마음과 의지를 사로잡기 위하여 죄인들에게 권고하였다. 청교도들은 이성적인 논증으로 죄인들에게 다가가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그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분명히 전하였다.

5. 청교도들은 회심을 하나의 과정으로 보았다.

준비론의 교리는 청교도가 경험하는 회심의 한 요소이다. 청교도들은 회개를 영혼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준비되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모든 신자는 예비적인 노력을 경험한다고 믿었다. 그리스도께 인도되며 영혼의 안식을 위하여 건너는 길 있는데 그것은 죄를 확신하고, 행위 언약에 대하여 죽으며, 마음이 겸비해지는 길이다.

청교도들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준비론에 익숙하였다. 하나님께서 청교도 설교자들을 이 문제들에 관해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청교도들이 많은 분투와 의심 끝에 그리스도 안에 안식을 발견하였는지에 대하여 수많은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있다.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길을 찾도록 도와주려고 애썼다. 청교도들이 회심과 관련된 경험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로 인하여 청교도들의 설교가 목회 중심적이 되었다. 청교도들은 사람들이 직면하는 어려움들을 해결하는데 목표를 두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성령의 내적 역사를 강조하였다.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되는 일에 영혼이 준비되는 다양한 단계에 대하여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있었다. 윌리엄 퍼킨스는 중생의 과정을 여덟 가지 단계로 기술하였다.

a. 말씀을 들음

b. 율법의 요구에 주의를 기울임

c. 개인적 죄를 생각함.

d. (죄의) 확신을 경험함

e. 복음의 약속을 묵상함

f. 복음의 약속들을 믿고 받아들임

g. 죄에 대하여 슬퍼함

h.새로운 순종의 생활을 함

토마스 후커나 토마스 쉐퍼드와 같은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참으로 영접할 수 있기까지 죄를 어느 정도 확신해야만 하는 죄인의 내적 경험에 주로 집중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실제적이 되기까지 모든 죄인들은 어느 정도의 겸비와 영적 고통을 경험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그런 극단적인 견해 중 하나를 토마스 후커가 주장하였는데, 그는 죄인은 깊이 겸비해 져야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런 견해에 반대한 사람들이 있는데 잘 알려진 존 코튼, 코튼 매더, 길레스 훼르민 그리고 리처드 십스가 그들이다. 그들은 후커와 쉐퍼드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다양한 방법이 있음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모든 준비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는 “율법 행위”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잘 알려진 안네 허치슨은 존 휠라이트와 존 코튼과 함께, 준비론자들이 행위 언약을 가르친다고 비난하였다.

복음을 믿는 일에 일반적으로 앞서는 “율법의 행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청교도들에게 공통적이었다. 그러나 율법을 통하여 죄를 확신하는 것은 복음적 문맥 안에서만 작용하는 것이다.

즉 율법의 목적은 죄인을 그리스도께도 인도하는 것이다. 의견의 차이에 관계없이, 모든 청교도들은 길든지 혹은 짧든지 마음의 겸비함과 회개, 죄의 확신이라는 “준비하는 일”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선행한다고 믿었다.

청교도들은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성령이 주시는 참된 구원의 은혜로 생각하였다. 청교도의 입장은 중생이 그리스도에 대해 최초로 믿음이 활동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다른 활동은 단지 일반적이고 준비적인 것일 뿐이다. (믿음의 활동외의) 모든 다른 활동은 은혜의 열매가 아니다. 즉 배교자조차도 그런(모든 다른 활동)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일반적인 역사는 종종 구원의 역사에 앞선다. 청교도들의 견해는 그러한 준비하는 일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끝나야 한다는 것이다.

청교도의 준비론이 주는 교훈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두 가지 가장 중요한 교훈을 강조하겠다.

1.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전에 어느 정도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단정하였다. 본질적으로 죄인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에 부적합하고, 무능하며, 배타적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일을 대적하는 많은 장벽이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타고난 율법주의와 은혜로 받는 구원에 대한 혐오가 상당히 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방법을 따라 구원을 얻는 일에 대한 무지와 맹목이 상당히 있다. 높은 산과 같은 교만이 평탄하게 되어야 만하고 깊은 계곡과 같은 무지, 좌절, 낙심이 메꾸어질 필요가 있다. 죄인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께 가는 길이 닦여져야만 한다.

2. 청교도들은 구원의 필요성을 확신해야한다고 믿었다. 자신이 죄와 비참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함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누구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화목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나아오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비참에 대한 인식 없이는 누구도 그리스도를 찾거나 귀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므로 비참을 인식하는 것은 믿음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비참에 대한 인식은 믿음 이전이나 이후에 오기 보다는 믿음과 함께 온다. 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높이 들린 놋뱀을 바라보았듯이 자신이 죄인인줄 아는 자가 믿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건강한 자는 의원이 필요 없지만 병든 자라야 의원이 필요한 것이다”(누가복음 5:31)

왜 구세주가 필요한지도 모르는 청중들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음을 믿으라고 촉구하는 현대 복음주의자의 메시지와 성경적이고 개혁적인 설교를 구별하는 요소가 바로 이것이다. 이런 차이점에서 성경적 설교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세상에 증인이 되라는 성화만을 강조하는 설교가 구별된다. 그런 설교자들은 골고다의 그리스도를 부인하면서 산상수훈의 그리스도만 주로 강조한다. 그런 설교자들은 산상수훈에 어울리는 삶을 살기 위하여 먼저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가져야한다는 것을 망각한 것이다. 성화가 칭의 앞에 올 수가 없다. 그러한 설교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정죄되고 상실된 죄인이며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 되어야 한다는, 사람이 처한 곤경의 핵심을 무시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알기 위해서는 죄를 드러내는 율법에 직면하여야 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죄와 비참이 얼마나 심각하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이점을 납득하였고, 그러므로 우리는 청교도들에게 많은 것을 계속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준비론을 설교하는 방법

그리스도를 위하여 마음이 준비되어야 한다는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 앞에 회개한 적도 없는 죄인들이 예수를 영접한다고 주장하는 피상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오직 죄와 비참을 깨닫는 것에 집중하여 죄를 드러낼 필요성을 단호하게 강조하는 방식으로 설교할 수 있다. 청중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는지 반복적으로 상기시킬 수 있다. 설교할 때마다 사람은 영적으로 죽었고 믿음과 회개에 무능하다고 강조할 수 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야 하며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단호하게 가르칠 수 있다. 경험적인 정통(교리)의 관점을 따라서, 예수님을 위한 (마음의) 자리가 마련되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간과하고 영생을 얻는다고 스스로 속임으로, 멸망할 것이라고 강조할 수 있다. 이런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그래서 율법을 설교해야 하는 필요성을 충족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앞선 준비하는 일을 충분히 전달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청중들이 자신들의 죄와 비참을 깨달을 것인가? 이런 방식이 청중들에게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보여줄 것인가? 이렇게 하면 청중들이 “오 하나님 자비를 베푸소서! “ 라고 부르짖게 할 것인가? 비참하고 타락한 상태에 대한 일반적인 진리를 들려주어도 사람들은 뜨뜻미지근할 것이다. (진리에) 끄덕거리며 동의하지만, 청중들은 진리는 지나쳐 버리고 정통적인 설교를 들었다고만 말할 것이다. 죽은 정통 속에서 그들의 마음은 딱딱해질 것이며, 그저 ”예수를 영접한“ 많은 사람들과 달리 자신들은 피상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설교로 청중들로 하여금, 죄인들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부르짖게 만드는 영적인 고통을 쉽사리 느끼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식은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참된 필요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렇다면 적절한 접근방법이 무엇인가? 사람의 타락한 상태를 차갑게 정통(교리)적으로 묘사하는 식으로 비참에 대한 설교를 할 필요는 없다. 율법에 대한 설교는 잠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기 위한 호소로 사용하여야 한다. 율법에 대한 설교는 자신의 실상을 드러내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율법을 설교하는) 특정한 목적은 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자신들이 처하게 되는 위험을 직면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자문해 보는 것이 유익하다. 죄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죄를 깨닫는가? 어떻게 누군가가 구세주를 바라게 되는가? 성령은 무엇을 사용하여 죄를 깨닫게 하시는가? 이런 질문에 사도는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다.”고 대답한다.(로마서 3:20)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직면함으로써 우리는 죄를 알게 된다. 이렇게 청교도들은 진지하고 단호하게 설교하였다. 청교도들은 맥케인의 유명한 시에서 말한 것을 사람들이 느끼게 만들었다.

율법의 공포가 엄습하므로 나는 두려워 떨었노라
나에게 피난처도 안전도 찾을 수 없네.

청교도들은 종종 죄를 (구체적으로) 거명하면서 율법을 선명하게 설교하였다. 청교도들은 간통이나 간음 같은 노골적인 죄뿐만 아니라 험담과 비방, 교만, 돈을 사랑함, 자랑함, 결혼과 가족관계 안에서의 폭력적 행동 같은 죄도 언급하였다. 청교도들은 특별히 완악함과 불신앙의 죄를 강조하면서 인간 존재의 전 영역을 하나님의 거룩한 법의 지배아래 두었다. 청교도들의 목적은 이중적이었다. 첫째는 청교도들은 청중들이 회개와 믿음의 요구에 직면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이 악한 길에서 떠나 그의 아들의 구원하는 복음을 믿기를 요구하시며 만일 회개하고 믿지 않는다면 심판하실 것이라고 알려주었던 것이다. 청교도들이 회개와 믿음을 요구한 것은 단순히 바르고 지혜로운 어떤 상담을 제공하거나 “하나님이 당신을 회개케 하시고 믿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는 간절한 열망을 표현한 것이 아니었다. 청교도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요구인,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마가복음 1:15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청교도들은 마음의 완악함과 불신앙의 원인은 사람의 무능만이 아니라 사람이 죄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임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율법을 설교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는 청교도들에게 배워야 한다. 얼마나 청중들은 자신들의 무능이라는 요새에서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왔는가! “나는 스스로 회심할 수가 없으므로 회개할 필요가 없다. 나는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복음에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청중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희생물이 아니라 완악한 자요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것이 바로 청중들로 하여금 회개와 믿음의 요구에 직면케 해야 하는 이유이다.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얼마나 신실하시며, 예수의 피를 무시하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를 선포함으로 이것이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이적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다면 그들이 이미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마11:22) 이 말씀에는 복음의 거룩한 열심이 나타나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복음 설교의 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 얼마나 중요한가!

청중들에게 율법이라는 거울을 들이대지 않으면,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는다면, 복음에 반응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청중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청중들이 복음의 가치를 알고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하시는 그리스도를 찾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로, 청교도들은 죄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고 하였다. 청교도들은 그리스도가 잃어버린 죄인들을 위한 완전하고 자비하신 구주이심을 설교함으로 그렇게 하였다. 청교도들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약속과 초대를 통하여 죄인의 구주로 자신을 주셨는가를 나타내 보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모든 필요를 능히 채우실 수 있는 분이시다. 청교도들은 불신앙의 정체가 최악의 죄임을 드러냄과 동시에 못 박히신 구주의 놀라운 능력을 강조하였다. 죄와 불신앙으로 인하여 마음이 고통으로 찔림을 받은 후에, 청교도들은 창에 찔려 허리에서 피와 물을 쏟으심으로 속죄의 피와 씻기는 물이 되신 구주를 죄인에게 알려준다.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마음과 양심에 호소하여 죄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죄인에게 증거하고 죄인 앞에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모든 충족성과 자비를 제시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라디아 4:19) 라는 바울의 말을 청교도들은 상기시킨다.

준비론에 대한 경계

준비론의 교리에 대한 위험성이 있다. 준비론은 복음을 조건적으로 변질시킬 수 있고 실제 그런 일이 발생하였다. 그런 준비는 어떤 기준에 맞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미 언급한 토마스 후커와 토마스 쉐퍼드는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경험해야 하는 어떤 단계, 즉 율법으로 죄를 깨달음, 마음의 회개와 죄의식, 저주와 형벌에 대한 복종으로 나타나는 하나님 앞에서의 궁극적인 자기 비하에 관하여 말하였다.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갈등과 혼란을 겪었으며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절망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특히 후커가 주장하는 겸비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었다. (후커의 주장에 의하면) 겸비가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토마스 굿윈은 “이제 회심한 당신이 우리의 어린 시절에 살았다면 당신은 우리가 죄를 위하여 겸비케 하는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각주 4

쉐퍼드와 후커는 위대한 영적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그 분별의 목적은 죄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오직 겸비해진 죄인만이 그리스도를 높이게 될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단계의 경험을 거의 필수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서 그들은 가난하고 회개하는 죄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길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집중하기 보다는 자신들을 준비하는 행위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코튼 매더는 쉐퍼드의 글을 참된 신자의 대작이라 불렀지만 마음의 겸비를 위한 필요조건을 규정한 것 때문에 회개에 관한 쉐퍼드의 책에 대해 심각한 의구심을 가졌다.

어떤 사람들은 준비하는 행위를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조건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하여 스스로 준비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앞서는 준비하는 일로 모든 초점이 옮겨졌다. 결과적으로 많은 청중들이 “나는 충분히 겸비해졌는가? 나는 복음을 정말 믿는가? 내가 그리스도께 진정 나아가는가?” 라고 반복적으로 자문하게 되었다. 많은 청교도들은 목회적 방식으로 회중들을 대하였고, 영혼의 참된 의사로서 사람들을 속박하는 매듭을 풀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적합성보다 필수조건의 적합성에 더 주목하였다.

코튼 매더는 “예수님이 두 강도 사이에서 못 박히신 것처럼 값없는 은혜의 교리가 법적 요구와 법적 적합성 사이에서 못 박혔다.”고 말했다. 각주5 이 말은 모든 준비론을 율법 행위로 일축해버린 안네 허치슨을 둘러싼 논쟁의 영향력을 드러내지만, 이 말에는 여전히 진리의 요소가 있다.

준비 행위의 교리가 은혜를 받기 위하여, 그리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믿기 위하여 충족시켜야 하는 조건으로 변질된다면 그것은 고통 받는 영혼에게 해로울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일이 오늘날도 일어나고 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하여 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수적이라고 한다면 죄인은 자신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균형을 잡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죽으셨음을 믿으시오” 라는 극단에 반대하여 “(죄를) 확신하며 자신의 의로움이 영적으로 벗겨지는 어떤 단계를 통과해야만 복음의 약속을 믿고 그리스도께 나아갈 것이다. 라는 다른 극단에 서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를 위한 (마음의)자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우리가 의지하는 기초와 조건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것만 아니라 죄에 대한 지식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근거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회개하는 죄인이 자신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주목하는 대신에 “내가 충분히 반성했는가? 충분히 교통을 받았는가?” 이런 질문에 전적으로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복음의 자유는 가려지고 회개하는 죄인은 어떻게 그리스도께 나아갈지 거의 알지 못하게 된다.

준비의 필요성을 가르치는 목적은 이런 것이 아니다. (준비의 필요성을 가르치는) 목적은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와 비참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저주받은 죄인이며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죄인임을 경험적으로 인식하게 하려는 것이다. (준비론)의 목적은 영혼이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게 만들어 죄인이 복음의 단순한 조건으로 구원받기를 원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영혼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든 준비는 하나의 목적, 즉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가난하고, 죄인이며, 무가치한 자임을 알고 그리스도께 나아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죄인을 사로잡아 주와 구주이신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이다. 진정으로 준비된 영혼은 어거스투스 탑레이디와 함께 이렇게 고백할 것이다.

나 가져갈 것, 아무것도 없네.
오직 붙들 것은 십자가 뿐
벌거벗은 나, 옷 입기 위하여 주께 갑니다.
소망 없는 나. 주님 은혜 바라나이다.
더러운 나, 씻기시는 샘으로 달려가나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나, 구주여 씻으소서

‘기도’, 헨리 나우웬 중에서

SAM_0809

우리가 진정 갈망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 자신의 가장 깊은 동경과 다른 이들의 동경을 귀기울여 들어보면, 인간 심령의 갈망이 가장 잘 압축된 단어는 ‘연합’이다. 연합이란 누군가 대상과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전한 연합을 찾기 전에는 쉴 수 없는 마음을 주셨다. 우리는 우정과 결혼관 공동체에서 그것을 찾으려 한다. 친밀한 성관계와 환희의 순간과 재능의 인정에서 그것을 찾으려 한다. 성공과 명예와 보상을 찾으려 한다. 어디를 보든 우리가 진정 구하는 것은 연합이다.

연합의 갈망은 하나님이 주신 갈망이다. 넘치는 기쁨뿐 아니라 지독한 고통을 유발하는 갈망이다. 예수님의 우리의 연합의 갈망이 헛된 것이 아니라, 그 갈망을 심어주신 분을 통해 채워진다는 것을 선포하러 오셨다. 잠시 지나가는 연합의 순간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연합의 그림자일 뿐이다. 연합의 갈망을 불신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가로막는 진정 위험한 일이다. 연합의 갈망은 하나님이 주신 갈망이다. 그것이 없을 때 우리 삶은 생명력을 잃고 우리 마음은 냉담해진다. 진정 영적인 삶이란, 모든 갈망의 아버지요 어머니인 하나님의 품안에서 쉼을 찾기 전에는 쉬지 못하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