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의 첫 열매가 왜 회심과 믿음일까?’, 백석대 유태화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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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_1990

https://www.facebook.com/taewha.yoo/ 참조

중생은 사도 요한의 해석에 따르면 성령께서 물로 씻듯 인간의 마음에서 그 부패성을 씻어내고, 새롭게 한 일로 보아야 한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본성의 부패와 오염을 경험하면서 지정의에 심각한 결함을 갖게 된 인간에게 복음이 들려질 때 성령이 내적으로 인간을 소명하는데, 이 내적인 소명은 인간이 항거하지 않고 복음 안에 계시된 그리스도에게로 인격적인 전환을 이루게끔 하는 성령의 사역이 그 핵심을 이룬다고 할 것이다. 중생은 인간의 지성을 밝혀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게 하는 사역이면서, 그 사실에 깊은 감동과 함께 마음으로 공감을 이루게 만드는 사역이기도 하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삶의 태도를 바꾸는 행위를 내포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따라서 중생한 인간은 성령의 역사를 좇아 그리스도와의 깊은 인격적인 연합을 이루게 된다. 소위 말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게 되는 일이 성령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을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unio mystica cum Christo)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신비적(mystica)이라는 말은 “성령을 통하여”라는 뜻이다. 이렇게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인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나는 두 가지 뚜렷한 인격적인 반응은 회심과 믿음이다.

중생의 결과가 왜 회심과 믿음일까? 조직신학, 특별히 구원론을 오랫동안 강의해오면서 갖게 된 깨달음은 이것이다. 이 두 반응이 나타나는 핵심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 때문이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이후 기독교가 견지해온 구속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파악하는데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랑이면서 동시에 공의로우신 분이다. 아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범죄한 후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되어야만 했으나, 아담에게 속한 그 누구도 이 조건을 만족케 할 존재가 없었고, 바로 그런 이유로 성자의 성육신이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해야만 했는데, 그 공의는 무엇보다도 죄에 대한 것으로 표현되어야 했다. 그러한 이유로 그리스도는 아담의 자손의 죄를 대신 걸머지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대신 걸머지고 하나님의 심판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또한 아담과 달리 아담의 자리에서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데, 그것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삶의 특징이었다. 달리 말하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유일한 하나님임을 신뢰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이었다. 그 깊은 신뢰로부터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으며, 이 세상의 피조물 가운데 하나로 하나님을 평가절하하지 않으며,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고, 자신의 창조주로 인하여 쉼을 누리며,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이웃을 제 몸처럼 대하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 예수는 참 인류의 새로운 머리로서,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이웃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분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바로 이 사랑의 삶을 살아낸 분으로서 십자가를 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삶인지를 몸소 보여주었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이유로 인하여 그리스도 예수와의 신비적인 연합인, 중생에 이르게 되면, 그리스도인이 회심과 믿음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조금 쉽게 말하자면,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의 깊은 연합을 말씀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이루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알아가게 되기에, 죄로부터의 인격적인 돌이킴을 보이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부르시고 중생에 참여하게 하시는 일은, 인간이 여전히 연약하고 죄인되고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서 일어난다. 죄인에게 죄를 다 씻고 오라고 말하지 않는다.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단 처리하시고, 그것에 근거하여 의로운 자로 간주하시어 당신의 자녀로 인정해주신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리스도야말로 바로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은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깊이 이해한 그리스도인은 인격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죄에 대하여 돌이키는 회심의 자리에로 나아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와 성령을 통하여 깊이 연합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헌신을 보이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리스도 예수의 삶을 깊이 묵상하면서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낸,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분임을 그리스도인이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삶의 특징을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을 통해서 깊이 체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깊은 신뢰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사신 삶 안으로 걸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삶을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게 되는데, 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장 소중하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창조와 구속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임을 명확하게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 예수와 성령을 통하여 연합된 그리스도인이 인격적인 회개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그의 삶에서 보이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인격적인 회심이 없는 그리스도 따름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인을 부르시지만, 그렇게 부름을 받은 죄인은 그리스도 예수와의 깊은 연합 가운데서 죄를 인식하고 죄를 떠나는 인격적인 결심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부르시며 용서하시되, 다시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은 금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정한 세 수 그 이상으로 토색한 삭케오를 용서하며 부르셨지만, 잘 차려진 밥상에 올라온 진미를 드시면서 누구의 고혈을 빨아 먹는 것인지 알아듣게 만드셨고, 그 결과로 인격적인 회개를 하도록 하셨다. 살인자 바울을 부르시고 구원과 이방인을 위한 귀한 직임을 맡기셨지만, 남은 생을 살아가면서 그 죄를 인한 깊은 회개가 동반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셨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과거의 삶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근거한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주와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 안에 터 잡고 형성해온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삶에서 돌이켜서 하나님 안에 깊은 신뢰를 둔 삶, 그를 신앙하는 삶을 살아가가는 전향적인 인간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고,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주요 또한 온전케 하시는 이인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와의 깊은 인격적인 교제를 이루면서 그분의 삶 안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은혜의 수단인 하나님의 말씀을 잘 활용하면서 부지런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삶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파악해야 한다. 성령의 깊은 감동과 함께 그의 인도를 기뻐하며 그 삶이 자신의 삶 가운데 형성되기를 위하여 애를 써야 한다. 피 흘리기까지 옛 삶의 관성에 저항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를 죽여야 한다. 이런 옛 습관을 끊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마귀와 그의 졸개들의 미혹을 딛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밝히 드러난 삶, 곧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빚쟁이 혹은 그만큼의 죄를 용서받은 죄인처럼, 그 탕감받은 것, 용서받은 것, 바로 그 근원적인 경험에서부터 일어나는 일이다. 그 은혜에 감사하는 근원적인 삶의 자리를 잃지 않으면서, 아니 더 적극적으로 바로 그 은혜의 자리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는 삶이다. 회심과 믿음은 용서와 은혜라는 그 근원적인 나무에서 필연적으로 맺힐 수밖에 없는 열매인 것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어떤 의미에서 회개의 의무를 지닌 특이한 공동체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공동체의 구성원은 누구도 상대방의 멱살을 거머쥐거나 구타하면서 회개를 요청할 수 없으나, 누구나 스스로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의 의무를 걸머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때, 그를 위하여 기도할 의무를 걸머지고 있을 뿐이다. 그의 죄로 인한 어려움을 공유하며 함께 애통해 할 수는 있으나, 끝까지 그를 놓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 마땅히 회개해야 할 중대한 죄를 고백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을 때,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권면했듯이 회개를 기대하면서 그의 영혼을 사탄에게 내어주는 일이 있을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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