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천년설에 대하여, 조동호 목사 옮김(19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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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칼빈 신학대학원(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조직신학 교수를 역임한 안토니 A. 호에케마(Anthony A. Hoekema)가 [무천년설]의 입장에서 요한계시록 20장 1-6절에 관한 “해석법의 문제”를 다룬 글이다.[Anthony A. Hoekema, “Amillennialism,” The Meaning of the Millennium: Four Views(Downers Grove, Illinois: InterVarsity Press, 1977). Edited by Robert G. Clouse. pp. 155-187.]

천년왕국설에 관한 무천년설의 이해에 대한 본인의 진술에서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다루고자 한다. 요한 계시록의 해석법, 계시록 20장 1~6절의 해석, 지상 천년왕국을 예언하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보고 있는 구약성경에서의 두 구절, 무천년설의 종말론에 대한 간단한 설명, 무천년설의 종말론에 대한 몇 가지 암시들에 대해 요약 진술을 다루고자 한다.

용어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고자 한다. 무천년설이란 말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천년설 주창자들이 어떤 천년왕국설도 믿지 않는다거나 또는 천년왕국 통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계시록 20장의 첫 여섯 절의 말씀을 간단히 무시 해버리고 있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들 어느 진술도 사실이 아니다. 비록 무천년설 주창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오는 문자적 천년 지상통치를 받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무천년설이란 용어는 이 들 학자들의 견해를 정확하게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제이 E. 아담스(Jay E. Adams) 교수는 무천년설이란 말은 현실화된 천년설이란 표현으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설은 미래에 있을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재 실현되고 있는 일로 믿기 때문에, 현실화된 천년설은 확실히 무천년설의 주장을 무천년설 이란 말보다는 더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화된 천년설이란 표현은 세 음절로 된 단순 접두사로 대치한 시원찮은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인은 무천년설이란 말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더 짧고, 더 잘 알려진 말인 무천년설이란 말을 계속해서 사용코자 한다.

목차

  • 1 계시록의 해석
  • 2 계시록 20장 1~6절의 해석
  • 3 구약 예언의 해석
  • 4 무천년설 종말론에 관한 간단한 요약
  • 5 무천년설 종말론의 몇 가지 암시들

계시록의 해석

왕국설에 대한 무천년설의 견해가 가진 배경을 살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계시록의 해석문제에 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서, 계시록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와 그 주변 시기에 일어날 사건만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배타적으로 미래적인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가정하자. 계시록 20장에서 지시된 것이 계시록 19장에서 기술된 것을 필연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또 가정 해보자. 그러면 결과적으로 20장 4절에 묘사된 천년왕국 통치가 19장 11절에 기술된 그리스도의 재림 후 따라야 한다고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계시록 20장 1~6절이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시작되는 전 교회 역사를 통해서 일어날 사건의 기술로 본다면, 지금 막 언급한 것과는 전혀 다른 계시록 20장의 왕국설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계시록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석 방법에 관해 먼저 언급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내게 가장 만족스런 계시록의 해석 방법은 그것이 비록 단점을 가지고는 있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윌리암 헨드릭센(William Hendriksen)이 쓴 그의 계시록의 주석『정복자들 이상의 정복자』(More Than Conquerors)에서 기술된(Progressive parallelism)으로 알려진 해석법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계시록은 서로 평행을 이루고, 각각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시기까지의 교회와 세상을 묘사하는 일곱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들 중 첫 부분은 1~3장까지에 나타나 있다. 요한은 부활하시고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께서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걷고 계시는 것을 본다.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요한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각각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들과 함께 분명하게 한 부분을 형성한다. 이들 서신들을 읽으면, 두 가지 것을 느낄 수 있다. 첫째, 계시록이 기록될 때의 사건들과 사람들과 장소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둘째, 이들 서신들에 내포되어 있는 원리들과 칭찬들과 경고들은 모든 시대에 처한 교회들에 주시는 말씀으로써 그 가치를 가지고있다. 실제로 이를 두 가지 관찰은 전 계시록의 해석을 위한 단서를 제시한다. 계시록이 주후 일세기에 교회에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계시록의 메시지는 그 때 일어난 사건들을 지칭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당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계시록이 또한 전 시대에 걸친 교회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계시록의 메시지는 또한 오늘날 우리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들 일곱 부분 중 두 번째는 4~7장에 나타난 일곱 인에 대한 환상이다. 요한은 하늘로 들림을 받아 광채 나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게된다. 그리고는 베임 바 된 어린양이 보좌에 앉으신 이의 손에서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기를 받으시는 것을 본다. 여러 가지 봉인이 뜯기고, 여러 가지의 하나님의 심판이 기술되고 있다. 이 환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의 배경에 대항하여 가해진 고난과 박해를 당하는 교회를 본다.

셋째 부분은 8~11장에 나타나 있고, 일곱 나팔의 심판을 기술하고 있다. 이 환상에서 우리는 교회가 복수를 갚게 되고, 보호되고, 승리하는 것을 보게 된다.

넷째 부분은 12~14장에 나타나 있고, 여인이 한 아들을 낳은 환상으로 시작하며, 용은 이 아이가 출생하자마자 삼켜버리려고 대기하고 있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분명하게 언급하는 말씀이다. 이 부분의 나머지는 사단을 상징하는 용이 교회를 계속해서 박해하는 것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또 용의 협조자들인 두 짐승, 즉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다섯째 부분은 15~16장에 나타나 있고, 일곱 대접의 진노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회개치 않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징벌을 매우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여섯째 부분은 17~19장에 나타나 있고, 바벨론 큰 성과 두 짐승의 몰락을 기술하고 있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항하는 세속주의와 불경건의 힘을 가진 세속도시를 상징하고 있다. 19장 말에는 용의 두 협조자들의 몰락과 최후의 징벌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이들 짐승들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과 동일인으로 나타나는 거짓선지자이다(16:13을 보라).

일곱째 부분은 20~22장에 나타나 있고, 용의 운명을 설명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적들을 쳐부수는 것으로써 종결을 짓고 있다. 또 이 부분은 최후의 심판, 교회와 그리스도의 승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불리는 새로워진 우주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비록 이들 일곱 부분이 피차 평행을 이루고 있지만, 이들 역시 일정한 양의 종말론적 과정을 제시하고 있음을 주목하자. 예를 들어서 마지막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도 더욱 더 미래에로 우리들을 인도하고 있다. 최후의 심판이 이미 1장 7에서 선포되었고, 또 6장 12~17절에서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하더라도 20장 11~15절에서야 비로소 상세하게 그것이 설명되고 있다. 오는 세상에서 누릴 구속받은 성도들의 최후의 기쁨에 대해서 7장 15~17절에 암시되어 있지만, 21장에서야 비로소 상세하고 격조 높게 새 땅에서 누릴 축복된 삶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21:1~22:5). 그러므로 이 방법의 해석법을 점진적 평행이라고 부른다. 이들 일곱 부분에는 개개의 부분에서는 물론 계시록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한 팀이 되고, 그리스도의 적들과 사단의 교회가 한 팀이 된 둘 사이의 투쟁을 묘사하고 있다고 인정한다면, 계시록의 첫 전반은(1~11장)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당하고 있는 교회를 묘사하는 지상에서의 투쟁을 기술하고 있고, 계시록의 나머지 절반은(12~22장), 용(사단)과 그의 두 짐승에 대한 교회의 박해를 기술하면서, 이 투쟁의 영적 배경을 더 깊이 다루고 있다. 이 분석에 의해서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인 20~22장의 적절한 해석을 찾게 된다.

이 마지막 부분은 사단에게 임한 심판과 그의 최후의 운명을 기술하고 있다. 사단이 그리스도의 최고의 적수이므로 그의 운명이 최후에 기술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계시록 20장 1~6절의 해석

우리는 지금 천년설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성경구절인 계시록 20장 1~6절의 말씀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먼저 이들 구절들은 분명하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자. 1~3절의 말씀은 사단의 묶임을 기술하고 있고, 4~6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혼들의 천년 통치를 기술하고 있다. 이들 구절들의 말씀에 대한 전천년설의 해석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 일어날 지상에서의 천년왕국 통치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써 그것들을 보고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앞장인 19장 11~16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만약 계시록 20장이 19장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을 연대적으로 이어지게 기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계시록 20장 1~6절의 천년왕국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 도래할 것으로 정말 결론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바와 같이 20~22장은 계시록의 일곱 부분들 가운데 마지막 부분을 형성하고 있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이어지는 일들을 기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계시록 20장 1절은 초기 신약시대로 다시 한번 되돌아간다.

이것이 이들 구절들의 적당한 해석이라는 것은 위에서 발전된 것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본 장이 사단의 패배와 최후의 운명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분명히 사단의 패배는 그리스도의 초림 때부터 시작되었고, 12장 7~9절에서 이미 상세하게 설명되었다. 4~6절에서 기술된 천년왕국통치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일어난다는 것이 본 장 11~15절에 기술된 최후의 심판이 천년통치 후에 오는 것으로써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로써 증명된다. 계시록에서 뿐 아니라, 신약성경 다른 곳에서도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되어 있다(계시록 22:11과 마 16:27;25:31~32; 유 14~15 그리고 특별히 살후 1:7~10을 보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계시록 20장 4~6절의 천년통치는 그리스도의 재림 후가 아니라 전에 일어나야 한다.

자, 계시록 20장 1~6절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1~3절의 말씀부터 보도록 하자.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 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 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이들 구절에서 사단의 묶임에 대한 기술을 보게 된다. 분명히 마귀 또는 사단과 동일 인물인 용은 일 천년 동안 묶이고 무저갱이라고 하는 곳에 던짐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 결박의 목적은 천년이 차기까지 더 이상 만국을 속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계시록은 많은 상징적 수를 쓰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일천”이란 수는 분명히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열이란 수는 완전을 상징하기 때문에, 또 천은 십의 삼 제곱이기 때문에 “일 천년”이란 표현은 한 완전한 기간, 무한정한 길이의 매우 긴 기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계시록의 구성에 대해서 상기한 바와 함께 그리고 사단의 잠깐 동안 즉, 최후의 결투와 최후의 심판을 기술한 본 장의 7~15절에 비추어 동의함으로써 이 천년 기간은 그리스도의 초림 시부터 그의 재림 직전까지로 연장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10, 14, 15절에서 언급된 “불못”이 최후의 심판장소에 대한 기술이 분명하기 때문에, 1, 3절에서 언급된 무저갱은 최후의 심판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저갱이란 말은 사단의 활동이 일 천년 기간동안 제한될 것이라는 비유적인 기술로서 오히려 생각되어져야한다.

그러면 사단의 결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약시대에 적어도 아브라함 시대이후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사단의 통치아래 있었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은 자들이었고, 그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죄악과, 그들이 용서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세상의 다른 나라들은 그 진리를 알지 못하였고(행 17:30을 보라), 때때로 하나님의 특별계 시를 접한 개인, 가족, 도시를 제외하고는 무지와 과오 속에 살았다. 이 시기에 이들 국가들은 사단에 현혹되었다고 말할 수 있고, 우리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죄에 빠진 것도 사단의 유혹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대 위임을 주셨다(마 28:19). 이 때에 제자들은, 만약 사단이 과거에 했던 방법으로 만국을 현혹하기를 계속한다면 우리가 이것을 가히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혹의 질문이 일어났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계시록 20장 1~3에서 요한은 이 질문에 확실한 해답을 주고 있다. 그의 대답은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인 복음시대 동안에는 사단이 과거에 했던 방법으로 계속해서 만국을 현혹시킬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결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의 전 시기 동안에는 너희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 것이며, 만국을 제자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로 의역할 수 있다.

이것은 사단이 결박당하여 있는 동안 아무런 해도 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요한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을 오직 의미할 뿐이다. 사단이 결박당하여 있는 동안에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는 것을 훼방하는 방법으로 만국을 유혹할 수 없다. 본 장의 뒤에서 천년이 끝난 뒤에는 사단이 결박에서 풀릴 것이며, 나가서 세상의 나라들을 유혹하여 끌어 모아 하나님의 백성을 대항하여 싸우며, 가능하다만 하나님의 백성을 멸망시키려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7~9절). 그러나 이것을 사단은 결박당하여 있는 동안에는 할 수 없다. 그러면 복음시대의 사단의 결박은 첫째, 복음의 확산을 막을 수 없고, 둘째, 그리스도의 모든 적들을 모아 교회를 공격할 수 없다는 것으로 우리는 결론을 지을 수 있다.

신약성경에 사단이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결박당하였다는 어떤 암시가 있는가? 정말 있다. 바리새인들이 사단의 권능으로 마귀를 쫓는다고 예수를 비방하였을 때,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9)고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흥미 있는 것은 강한 자의 결박을 기술한 마태의 어휘가 계시록 20장에서 사단의 결박을 기술하기 위해서 사용된 단어와 같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이기시므로 승리의 개가를 올리셨고, 이때 사단을 결박하셨다. 예수의 마귀를 쫓으심은 이 승리에 대한 증거라는 것을 이 말씀에서 우리들에게 가르치신다. 여기서 언급된 사단의 결박은 복음의 전파와 연결하기보다는 마귀의 쫓으심과 연결하여 보도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마귀의 쫓으심은 하나님의 왕국의 임재에 대한 증거이며(마 12:28), 복음이 현재 만국에 전파될 수 있는 것은(마 13:24~30, 47~50을 보라) 분명히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칠십 인이 복음 전파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들은 예수님께 말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라고 하였다. 이때 예 수는 대답하시기를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보았노라”고 하셨다(눅 10:17~18). 이들 언어들은 말할 것도 없이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오히려 그의 제자들이 행하고 있는 사역에 의 해서 사단의 왕국이 치명적인 일격을 받았다는 징후 즉, 사단의 일정한 결박 또는 그의 권세의 일정한 제한이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해되어야 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 사단의 추락 또는 결박은 예수의 제자들의 선교활동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사단의 활동의 제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교사역과 연결되는 또 하나의 성경말씀은 요한복음 12장 31~32절이다. “이제 이 세상에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 끌겠노라 하시니”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쫓겨나리라”로 번역된 동사 “ekballo”로는 계시록 20장 3절에 “무저갱에 던져(ballo)” 라고 사용한 어휘와 같은 어원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심지어 더 중요한 것은 사단의 쫓겨남이나 던짐 당함이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리스도께로 인도될 것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는 관찰이다.

그러면 계시록 20장 1~3절에서 기술된 사단의 결박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전체 복음시대를 통한 사단의 영향력이, 비록 그것이 완전히 박멸된 것은 아니다 하더라도, 매우 큰 타격을 입어서 세계의 모든 국가들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방해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 시대의 사단의 결박으로 인하여, 국가들은 교회를 정복할 수 없고, 오히려 교회가 세상을 정 복하고 있다.

이제 일 천년 통치를 다루고 있는 말씀인 4~6절의 말씀으로 주제를 옮겨 볼까 한다. 계시록 20장 4~6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례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우리는 1~3절의 말씀이 천년시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이미 주목한바 있다. 4~6절의 말씀 또한 천년시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음을 지금 보게 된다. 4~6절의 천년기간이 1~3절의 천년기간과 다른 시기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써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왜 그렇게 믿어야 되는지 확실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1~3절과 4~6절의 말씀이 같은 시기의 천년을 말하고 있다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본대로 그 기간은 전체 신약시대 즉,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까지의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믿는다.

4절 말씀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고 4절은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직면해야 할 첫째 질문은 이들 보좌들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계시록에 “보좌”라는 말이 47번 사용되고 있는데, 세 번(2:13; 13:2; 16:10)을 제외한 이들 모든 보좌들은 하늘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요한이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을 본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 고려 점에 부과한다면, 우리는 요한의 환상의 장소는 이제 천국으로 바뀌었다는 결론을 확고히 내릴 수 있다. 그러면 이들 여섯 절에 기술된 일 천년시기는 내내 같은 반면에 1~3절은 이 천년시기에 지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기술하고 있고, 4~6절은 천국에서 일어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은 심판하는 권세를 받은 자들이 앉은 것을 본다. 계시록은 정의문제에 특히 박해 당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정의문제에 훨씬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의 환상에서 보좌들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심판할 권세가 주어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보좌 위에 앉은 것으로써 그들에 대한 요한의 기술은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한다는 생각을 표현하는 하나의 견고한 방법이다(4절 후반 절을 보라). 분명히 이 통치는 재판할 수 있는 권세를 포함한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재판에 대해 단순히 동의하고 감사한다는 뜻인지 또는 보좌에 앉은 자들에게 세상일에 대한 그들 스스로의 재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의미인지는 확실치 않다. 어떤 경우에서든 여기 기술된 그리스도와의 다스림은 그리스도의 재판 활동에 부분적으로 동참하고 있음을 포함한다(단 7:22을 보라).

다음 문제는 누가 이들 보좌 위에 앉는가 이다. 해답은 나머지 절인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에서 주어지고 있다. 요한은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을” 보았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지상에 현재 살고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확실히 “혼들”(psuchai)이란 말은 때때로, 사도행전 2장 41절의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며,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 이나(three thousand souls) 더하더라”는 말씀과 같이 지상에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을 기술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계시록 20장 4절에서의 psuchai(혼들)란 말에는 이러한 의미가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Tas psuchai ton pepelekismenon을 “목 베임 당한 사람들” 또는 “목 베임을 당한 백성들”이라고 해석 할 수 없다.[여기서 저자는 목 베임을 받은 사람들은 죽은 자들이므로 psuchai를 “혼들”이라고 번역해야지, 그것을 마치 산 사람처럼 “목 베임 받은 사람들 또는 백성들”로 해석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psuchai이란 말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지칭하는 말이어야 한다. 실제로 이 본문은 계시록 6장 9절의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 가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아래 있어”의 말씀과 일종의 평형을 이룬다.

요한이 죽은 자들의 영혼을 어떻게 볼 수 있었는가를 묻는다면, 해답은 요한이 환상 속에서 이 모든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또 어떻게 요한이 천사가 마귀를 잡아 일 천년동안 결박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가? 라고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은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을 본다. 환언하면 순교자들의 영혼들 즉 그리스도께 바친 충성심 때문에 순교의 죽음을 당한 신앙인들의 영혼들을 요한은 본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하였을 때,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믿음 때문에 순교를 당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에 기록된 환상은 이들 순교자들의 친척들이나 친구들에게 많은 위안을 줄 것이다. 요한은 그들의 영혼이 지금 천국에 있는 보좌들에 앉아서 심판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보고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 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다.” 신국제개역(New International Version)성경은 마치 그들이 앞에서 말한 절에서 언급한 순교자들에 대해서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이들 말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표준개역(American Standard Version) 성경에서 발견되는 번역에 의해 전달된 가능성인 또 하나의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 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않은 것과 같은” 이라고 이 성경은 쓰고 있다. 이 미 계시록에서는 믿지 않는 그리스도의 반대자들과 그의 왕국은 짐승과 그의 우상을 숭배하고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로써 기술되고 있다(13:8, 15~17; 14:9~11을 보라). 그 반대로 주님께 믿음을 지킨 신자들은 짐승과 싸워 승리한 자들로써(15:3) 또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 경배하지 아니한 자들로써(13:15)기술되고 있다. 그러므로 본인은 요한이 단지 순교자들보다는 더 폭넓은 그룹을 본 절에서 기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끝까지 고수하고 반기독교적인 권세에 대항한 모든 기독교인을 의미한다. 순교의 죽음을 당한 자들은 이 그룹의 일부이긴 하나, 그들이 이 그룹의 천체는 아니다(비록 요한이 여기서 “영혼들”에 대해서 특별히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베임 바 당한 순교자들의 영혼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였기 때문에 죽은 신자들의 영혼에 대해서 아직까지 말하고 있다고 별 무리 없이 추측할 수 있다).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구절은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 하니”하신 말씀이다. 전천년설 해석자들은 시대구분론이나 비시대구분론이거나를 막론하고 이 구절이 죽음으로부터의 문자적 부활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이 구절에서 지상에서의 재림 후 그리스도의 천년통치에 대한 입증을 찾는다. 이것이 이 구절의 정확한 해석인가?

“살아서”로 번역된 헬라어 ezesan은 육체적 부활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마 9:18; 롬 14:9; 고후 13:4; 계 2:8을 보라). 그러나 이것이 그 단어가 여기서 의미하는 것인지가 문제이다. 요한이 여기서 부활의 종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은 5절 하반 절의 “이는 첫째부활이라”하신 말씀 즉, 4절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서 통치하는 것을 분명히 말하는 말씀으로 보아서 분명하다. 그러나 이 첫째부활이 육체의 부활 즉 죽음에서 일어나는 몸의 부활을 말하는 것인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죽음에서 얼어나는 몸의 부활은 여기서 기술된 것과는 구별이 되는 무엇으로써 20장 11~13절에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개의 몸의 부활 즉, 천년왕국 초기의 신자들의 부활과 천년왕국 후에 있을 불신자들의 부활을 믿을 때에만 비로소 4절의 ezesan이 몸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신자와 불신자 모두를 포함하는 한 가지의 몸의 부활만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요 5:28; 행 24:15을 보라), 4절 하반 절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있을 육체나 몸의 부활이 아닌 다른 무엇이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 하니”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4절 전 반절에 실마리가 이미 주어져 있다. 거기 서 요한은 말하기를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앞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고 하였다. 하반 절은 보좌에 앉은 자들은 죽은 백성들의 영혼들 즉, 믿음 때문에 순교 당한 자들과 생명이 다하기까지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 바친 성도들이었다고 간단하게 설명한다. 이것이 “살아서 천년동안 왕노릇”한 그룹이다. 비록 이들 성도들이 죽었지만, 몸으로서가 아니라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를 나누며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의미에서 요한은 살아있는 것으로써 그들을 본다. 이 삶이 지고한 행복의 삶이다(빌 1:23과 고후 5:8에서 쓴 바울의 말씀을 보라). 그것은 그들이 보좌에 앉아 만물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함께 참여하며, 심어지는 심판하시는 일에까지 함께 참여하는 삶이다. 이 하늘의 통치가 계시록에서 이 미 언급한 약속인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3:21) 하신 말씀의 성취이다.

요한의 시대에 교회가 빈번한 압박과 핍박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때, 우리는 이 환상의 중요성을 인식 할 수 있다. 비록 많은 동료 기독교인들이 죽었고, 일부는 심지어 순교를 당하기까지 극악한 처형을 받았다 할지라도, 이들 죽은 동료 신자들이 그들의 영혼에 관한 한 현재 실제로 천국에 살아 있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서 통치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그들 성도들에게는 대단한 위로가 됐으리라. 요한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서 다스리는 것은 천년동안 즉, 전체 복음시대에 걸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무덤에서 이들 성도들의 몸을 살리시기까지 계 속 될 것이라고 한다.

요한이 지상 천년왕국 통치를 기술하고 있다는 어떤 암시도 이들 구절들에 나타나 있지 않다. 우리가 본 장면은 천국에 고정되어 있다. 아무것도 4~6절에서 지상에 관하여, 특히 이 통치의 중심지인 팔레스타인이나 유대인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계시록 20장 4절의 일 천년 통치는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서 다스리는 통치를 말한다. 이 통치는 미래에 나타날 어떤 것이 아니며,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천년왕국의 문제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상에 있는 것이라는 것이 기억된다면, 현실화된 천년왕국설이란 말은 여기 변증된 견해에 대한 적절한 기술이 될 것이다. 다음 문장인 5절 상반 절은 괄호 속에 들어가야 할 성질의 것이며, 그러므로 신국제개역에서는 그것이 괄호 속에 다음과 같이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라고 적절히 놓여 있다. 이들 말이 천년왕국 이후에 일어날 몸의 부활을 기술하고 있다는 것을 왜 본인이 믿지 않는지 그 이유를 이미 언급한 바 있다. ezesan이란 말은 본문에서 사용된 대로 전문에서 그것이 의미했던 꼭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한은 여기서 불신자들의 죽음 즉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의 죽음에 대해서 요한이 방금 기술한 신자들의 죽음과 구별하여 말하고 있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이 살지 못하더라고 요한이 말할 때는 그가 방금 신자들에 대하여 말한 것과는 반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즉 불신자들은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이 일 천년 기간 동안 통치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사후에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서 새로운 삶을 즐기며, 그리스도의 통치에 함께 동참하는 한편, 사후에 불신자들은 이 생명이나 통치 어느 것도 함께 나누지 못한다.

일 천년 기간 전반에 걸쳐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라는 말에 의해서 지적되고 있다. 여기서 “까지”로 번역된 헬라어 achri는 여기서 말한 것이 천년 기간의 전체 기간 동안 사실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까지”라는 말의 사용은 이들 죽은 불신자들이 살아서 이 기간이 끝난 후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효과에 대한 분명한 진술을 우리가 기대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진술의 예문은 계시록 20장 3절에 나타나 있다). 오히려 일 천년이 끝난 후 죽은 불신자들에게 일어날 일은 6절에서 말하는 “둘째 사망”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둘째 사망”이 죽은 신자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는 것을 6절에서 말하는 것은 “둘째 사망”이 죽은 불신자들 위에 권세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사망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14절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 둘째 사망은 몸의 부활 후에 받는 영원한 형벌을 의미한다. 죽은 불신자들에 관한 한, 일 천년이 끝난 후에 변화가 있을 것이며, 더 좋아지기 위한 변화가 아니라 더 나쁘게 되는 변화가 될 것이다.

요한은 “이는 첫째 부활이라”고 계속해서 말한다. 이 구절은 방금 설명한 괄호 속의 진술 직전에 나오는 4절 하반 절에 요한이 기술하고 있는 죽은 신자들에게 일어난 일을 묘사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것에 비추어서 우리는 이들 말들이 몸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의 죽음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서 누리는 삶의 전환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전환이 여기서 부활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잘 쓰는 말은 아니지만, 앞서의 문맥의 배경에 비추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첫째 부활”이란 표현은 이들 죽은 성도들을 위한 “둘째 부활” 즉 일 천년기간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일어날 몸의 부활이 정말 있을 것을 의미한다. 요한은 6절에서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라고 말한다. 다음 구절에서 축복된 이유를,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는 데 두고 있다. 우리가 본대로 둘째 사망은 영원한 형벌을 의미한다. 둘째 죽음에 대한 이들 말들은 요한이 막 언급한 “첫째 부활”이 몸의 부활이 아님을 뜻한다. 왜냐하면, 만약 신자들이 영화롭게 된 몸들 즉, 육체적으로 일으킴을 받은 것으로써 여기서 생각되어야 한다면, 그들은 이미 도래할 생명의 충만한 축복을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 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이 전체 천년 기간동안, 죽은 신자들은 제사장으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스릴 것이다. 요한이 여기서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연장될 기간을 단지 일 천년 가량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계시록의 마지막 몇 장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 몸의 부활 후에 이들 죽은 성도들이 그들이 현재하고 있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며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수 있을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은 새 땅에서 영화롭게 된 몸으로 죄 없는 완벽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시록 20장 1~6절의 무천년설의 해석이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대로 이들 본문은 우선적으로 유대인의 왕국으로 세워질 그리스도의지상 통치에 대해서 아무것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이 천국에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다스리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죽은 날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다스린다.

구약 예언의 해석

전천년설 주창자들과 무천년설 주창자들 사이에 채택된 성경해석방법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전천년설 주창자들 특히 시대구분론적 전천년설 주창자들은 소위 구약 예언의 “문자적” 해석이라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시대구분론적 전천년설의 대표적인 인물인 존 F. 발부르드(John F. Walvoord)는 이 해석학파의 해석학적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전천년설의 입장은 문맥이나 신학적 이유들이 이것이 저자가 의도한 것 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지 않는 한 성경은 신학의 모든 분야에서 평범한 문자적 및 역사적 의미 속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에 관한 그의 논술에서 발부르드는 때때로 구약성경의 말씀은 부분적이나마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아니하고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할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고 인정하고, 그리스도께서 이사야서 11장 4절에서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하신 말씀을 그 예로 들었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그와 반대로 많은 구약성경의 예언이 정말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져야 하지만, 대부분의 구약 예언들은 비문자적인 방법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추상적으로는 무천년설 주창자들이 발부르드의 전천년설의 해석법에 대한 정의에 동의를 할지 모른다. 무천년설과 전천년설 해석자들의 차이는 각각의 해석자들이 어느 예언들은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하고, 어느 예언들은 비문자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가를 지적하려고 할 때 생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견해의 차이가 심하다.

지면관계 상 해석상의 격차를 깊이 있게 다룰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전천년설 주창자들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장래의 지상 천년왕국 통치를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두개의 구약성경 구절을 간단히 살펴보는 것 이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이들 두개의 대표적인 구절들에 대한 전천년설의 해석이 어떠한 의미에서도 단 하나의 유일한 해석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신스코필드성경(New Scofield Bible)에 의해서 제시된 이사야서 11장 6~9절을 먼저 살펴보자.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 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상기한 이사야서 11장 1~10절까지를 1967년판 신스코필드성경(New Scofield Bible)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회복될 다윗 왕국: 그 성격과 범위”라는 제목으로 적고 있다. 1절에 대한 주석으로 다음과 같이 “11장은 다윗의 아들이 영광 가운데에 재림하실 때 세워지게될 미래의 왕국이 누릴 영화에 대한 예언적 묘사이다” 라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신스코필드성경은 이 성구가 장래의 천년왕국시대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시대구분론적 전천년설의 대표적인 주석가인 발부르드는 11장에 대한 해석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사야 11장은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생생한 묘사이며 현 시대와 혼동될 수 없는 장면이며, 중간상태이며 또는 이것을 평범한 문자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영원한 상태를 말한다. 제시한대로, 이것은 지상 천년왕국을 기술하고 있다. (11장에서 발견된) 기술은 이리, 어린양, 표범, 어린 새끼들, 소, 어린 사자들, 그리고 천국의 것이 아닌 지상에 사는 모든 피조물과 같은 짐승을 기술하고 있고, 이들 짐승들은 지상 천년왕국에만 적용될 수 있는 평정의 시기에 사는 것으로 계속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만약 독자가 미래의 천년왕국을 믿는다면, 이들 성구에서 기술된 그 천년왕국을 볼 것이라는 것이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어떤 의미에서도 단 하나의 유일한 해석방법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 말에 새 땅이 나타날 것을 성경이 예언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예를 들면 이사야 65:17; 66:22; 계 21:1을 보라). 왜 그러면 우리는 새 땅에서의 삶에 대한 기술로서 이들 구절에서 말하는 세부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이것 이 특별히 9절에 실린,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는 완전한 파노라마 식의 환상의 관점에서 더욱 그렇다. 왜 이들 말씀이 새 땅이 나타나기 이전 일 천년 시기에만 적용하는 것으로써 생각되어져야만 하는가? 이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의 최종적인 완전성을 묘사하지는 않는가? 이것과 관련해서 본인이 제시하고픈 다른 구약성경의 말씀은 이사야서 65장 17~25절이며, 역시 신스코필드성경에서 인용한다.

[17]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19]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20]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 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것이리라. [21]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22]그들의 건축한 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23]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24]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25]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상기의 17절의 말씀을 신스코필드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이란 제목으로 적고있다. 이 성경의 편집자들은 17절의 말씀은 마지막 새 땅에 대해서 기술하는 것으로 마지못해 받아드리면서, 18-25절의 말씀은 제한시키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발부르드는 이와 비슷하게 이사야서 65장 17-19절은 영원한 상태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써 그리고 20-25절은 지상 천년왕국의 상태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써 이해하고 있다. 만약 독자가 장래의 지상 천년왕국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확실히 설득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더 주목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독자가 그와 같은 지상 천년왕국을 믿는다면, 그는 여기서 이들 성구들이 그것에 관해서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믿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가 오히려 심각한 주석학적 장애를 극복해야할 것이다.

독자는 이들 성구들에서 지상 천년왕국에 관한 기술을 발견할 수 있겠지 만, 17~18절에서 발견되는 것들을 의도적으로 간과함으로만 가능하다. 17절 은 분명하게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최종적인 상태라고 묘사하고 있다). 18절은 17절에서 언급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단지 일 천년 동안만이 아니라, 영원토록 기쁨을 누리라고 외치고 있다. 이사야는 여기서 천 년밖에 지속이 안 되는 새로운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아니 하고, 오히려 영원토록 지속되는 새로운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19절에서 따르는 말씀도 앞에서 언급한 말들에 직접적으로 연결을 짓 고 있다.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 할 것이며” 라고 말하고 있다(계 21:4을 보라). 19절에서나 18절 또는 20절에서 이사야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에 앞서 나타나는 천년왕국 시대에 대하여 갑자기 기술을 바꾸고 있다는 어떠한 암시도 없다.

실제로 25절에는 이사야서 11장에서 기록된 최종적인 상태에 대한 묘사에 대해서 생각나게 하는 동물세계에 대한 기술이 있다. 25절 하반 절은 11장 9절의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에 대한 반복된 언급에 지나지 않는다. 새 땅에 대한 정 말 아름다운 하나의 기술이다. 독자는 단지 그가 먼저 지상 천년왕국이란 색안경을 쓰고서야 비로소 여기서 지상 천년왕국을 보게될 것이다.

무천년설 종말론에 관한 간단한 요약

무천년설 종말론에 대한 보편적인 비판은 합의되지 않은 종말론적 체계를 반박하고 반대하는데 최우선적으로 힘을 소진하고 있고, 너무 부정적이라는데 있다. 이 비판이 옳고 그른 것의 문제를 떠나서 무천년설 신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적극적 긍정을 간단히 스케치함으로써 일부 무천년설 의 종말론에 대한 부정적 요소를 이 시점에서 제거하고자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설에 대한 일정한 해석으로서만이 아니라 무천년설의 종말론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스케치는 첫째, 무천년설 종말론이 출범한 종말론(inaugurated eschatology)에 관하여 가르치는 것이 무엇이며, 둘째, 무천년설 종말론이 미래의 종말론(future eschatology)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두 가지 점에서 다룰 것이다. 출범한 종말론이란 말은 현실화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란 말보다 더 낫다. 왜냐하면 출범한 종말론이란 말이 위대한 종말론적 새김이 역사 속에 이미 새겨졌다는 사실을 아주 잘 반영하는 한편, 미래에 있을 계속적인 종말론의 전개와 최종 완성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출범한 종말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약성경을 신뢰하는 신자는 중요한 종말론적 사건들이 이미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다른 종말론적 사건들도 여전히 미래에 나타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출범한 종말론을 논하면서 무천년설은 다음과 같은 내 용을 주장한다.

1)그리스도는 죄, 사망, 사단을 누르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셨다.

무죄 한 삶을 사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서 구속의 희생으로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으로 그리스도는 죄를 패배 시키셨다. 죽음을 맛보시고 무덤에서 승리롭게 일어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사망을 패배시키셨다. 사단의 유혹을 이기시고 하나님께 완전하게 순종하셨고,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단과 그의 사악한 군대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셨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결정적이며 최종적이었다. 그러므로 역사상에 가장 중요한 날은 아직 미래의 일인 그리스도의 재림이 아니라, 과거에 이미 일어난 그리스도의 초림이다. 그리스도의 승리 때문에 역사상의 궁극적인 이슈들은 이미 결정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승리가 최종적인 완성에 이르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2)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와 미래 모두 다이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이 다윗의 왕좌의 문자적 회복을 믿는 우선적으로 유대인 왕국이 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의 불신앙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미래의 지상 천년왕국의 건립을 연기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이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워졌고, 현재 역사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도래할 세상에서 완전히 그 모습을 나타나기로 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 역사 속에서 다이내믹하게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라고 이해한다. 그것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며,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만드신 전체 우주를 통치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의 실재이며, 미래의 소망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더라도 예 수는 왕국이 이미 임재하였음을 분명히 가르쳤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할 것인지를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고 대답 하셨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왕국이 여전히 미래에 도래할 왕국의 의미도 있다는 것을 특별히 하신 말씀(마 7:21~23; 8:11~12)과, 종말론적 비유(혼인잔치, 가라지, 달란트, 열 처녀 비유와 같은 비유)에서 가르치고 있다. 바울도 역시 왕국을 현재(롬 14:17; 고전 4:19~20; 골 1:13~14)와 미래(고전 6:9; 갈 5:21; 엡 5:5; 딤후 4:18)에 모두 존재하는 것으로써 기술하면서 진술하고 있다. 하나님의 왕국이 어떤 의미에서는 현존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에 올 것이라는 사실은 그 왕국의 신하들인 우리들은 “이미”와 “아직”이란 일종의 긴장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 미 그 왕국에 살고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왕국의 완전한 나타남을 고대하고 있다. 우리가 이미 그 왕국의 축복들을 누리고 있으며, 또한 그 왕국의 완전한 승리를 기다린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정확한 시기를 모르기 때문에 교회는 역사의 종말이 멀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긴박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교회는 계속해서 계획을 세우고, 아직도 오랜 시간 계속될지도 모를 이 현 지구에서 미래를 위해 계속해 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하나님의 왕국은 그리스도와 그의 대의를 위해서 완전한 헌신을 바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개인들뿐만 아니라 전 우주의 구속의 목표에 비 추워서 삶의 모든 것과 현실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명성 있는 네덜란드 신학자이자 정치가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한 때 언급한 것처럼, 이 우주상 어느 한 조각도 그리스도께서 “그것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완전한 헌신은 역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수행하는 것으로써 보아져야 한다는 기독교인의 역사철학을 또한 의미한다. 이 왕국 환상은 예술과 과학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반영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찬양을 위해 추구되어야 할 것이라는 기독교인의 문화철학을 포함한다. 그 왕국의 환상은 또한 모든 소명들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이것이 공부이든, 가르치는 것이든, 목회 하는 것이든, 사업, 공업 또는 가사 일이든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찬양을 위 해 행하여져야한다는 기독교인의 직업관을 또한 포함한다.

오늘날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일고 있는 긴장의 보편적 근원은 교회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할 것이 복음이냐 또는 사회정치활동이냐의 문제이다. 본인 생각으로는 알맞은 왕국 환상은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균형을 유지시켜 주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불려 들이는 복음은 교회의 본질적인 임무중 하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은 완전한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에, 교회는 정치사회를 포함한 모든 삶의 분야에서 기독교의 원리들이 실천될 수 있도록 최선의 관심을 쏟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복음과 사회 관심은 기독교인이 선택해야할 옵션으로서 생각해서는 결코 아니 되며, 모두다 완벽한 왕국 순응에 필수적이다.

3)마지막 날이 아직 미래에 있을 사건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지금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

복음주의자들 가운데에서도 자주 경시되고 있는 종말론의 이 측면은 신약성경 메시지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우리가 지금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 고 본인이 말하는 것은 “마지막 때”가 그리스도의 재림직전 어느 특정 시기를 말하는 것은 물론,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의 전체시대를 기술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기록자들은 그들이 말하고 기록할 당시에 그들이 이미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강림 후 마지막 때에 모든 육체에게 물 붓듯 부으시는 성령의 강림에 대하여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한 그의 설교에서 이 사실이 특별히 언급되고 있다(행 2:16~17). 그러므로 베드로는 “우리가 지금 선지자 요엘이 예언한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말하고 있다. 바울도 “또한 말세를 만난 무리”(고전 10:11)라고 당대의 신자들을 기술함으로써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사도 요한 역시 당대의 독자들에게 그들이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요일 2:18). 이들 신약성경의 가르침 에 비추어서, 요한이 흔히 쓰는 “말세”(요 6:39~40,44,54; 11:24; 12:48)라는 종말론적 사건들의 최종적 완성에 대해서 성경이 역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한편, 우리는 또한 출범한 종말론에 대해서 진정 말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이미 종말론적 축복들의 시작들을 맛보고 있다는 것과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롬 8:23). 신자인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시험에 직면해서 어쩔 줄 모르는 허약한 죄인으로 보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고후 5:17), 성령의 성전들로서(고전 6:19), 그리고 육체를 결정적으로 십자가에 못박고(갈 5:24) 옛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자들로서 본다(골 3:9~10)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이 부정적인 측면보다는 우선적으로 긍정적인 측면에서 우리 자신의 이미지를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또한 동료 기독교인들을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로서 그리고 우리가 그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해야할 것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4)계시록 20장의 일 천년에 관한 한, 우리는 현재 천년왕국 안에 있다.

계시록 20장 초반부에서 계시록 20장의 일 천년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사단이 잠깐동안 결박에서 풀릴 때인 그리스도의 재림직전까지 연장된다는 입장을 위해 증거가 제시되었다. 계시록 20장의 천년에 대한 무천년설의 입장은 사단이 이 기간 동안 결박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 살아 있는 기독교인들은 이 천년 왕국의 혜택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언급한 대로 사단이 현재 결박되어 있다는 사실은 사단이 오늘날 이 세상에서 활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단은 이 시기 동안 만국을 현혹할 수 없다. 즉 복음의 전파를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기 동안의 사단의 결박은, 환언하면, 선교와 복음전파를 가능케 한다. 이 사실은 확실히 지상의 교회에 위안의 근거가 될 것이다.

무천년설은 또한 이 천년 기간 동안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이 몸의 부활을 기다리는 동안 현재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서 왕노릇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그들의 상태는 비록 그들의 기쁨이 그들의 몸이 부활할 때까지는 완전하지 않다 할지라도 축복과 행복의 상태이다. 이 가르침은 그들의 사랑하는 자들이 주의 품안에 있는 자들에게 확실히 위안을 가져올 것이다.

미래의 종말론에 관해서 무천년설은 다음의 것들을 인정한다.

1)”말세의 징조”는 현재와 미래의 관련성을 모두 갖는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말세의 어떤 징조들이 나타날 것을 믿는다. 예를 들면, 모든 나라들에 복음이 전파되고, 이스라엘 전체의 회심, 대배교, 대환란 및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들 징조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바로 직전시기에 나타날 배타적인 것들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초창기시대부터 있었으며, 현재에도 존재한다. 이것은 재림을 항상 준비해야 한다는 것과 우리 생각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먼 미래에 있을 사건으로 밀어 내버려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이들 “말세의 징조”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바로 직전에 절정을 이룬 최후의 성취를 갖게 될 것을 믿는다. 이 성취가 전적으로 새로운 현상의 형태를 취하기보다는 오히려 오랫동안 현존해왔던 징조들이 강하게 증대 될 것이다.

2)그리스도의 재림은 단 한번의 사건일 것이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시대구분론적 전천년설 주창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칠 년의 기간사이에 두는 두 가지 측면(때때로 휴거와 출현 또는 계시로 불린다)으로 나누는 주장에 대해 성경적 근거를 찾지 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단 한번의 사건으로 이해한다.

3)그리스도의 재림 당시에 신자와 불신자 모두의 단 한번의 일반적인 부활의 사건이 있을 것이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신자의 부활과 불신자위 부활을 천년기간으로 분리하는 보편적인 전천년설 교리를 반대한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또 셋 또는 네 번의 부활이 있을 것으로 주장하는 시대구분론자들의 견해에 반대한다(앞서 언급한 두 번의 부활이외에도 시대구분론자들은 대환란 성도들의 부활과 천년왕국 기간 동안에 죽은 신자들의 부활이 있을 것도 가르친다). 우리는 이와 같은 다수의 부활에 대해 성경적 근거를 찾지 못한다.

4)부활 후, 아직 살아있는 신자들은 그 때 갑자기 변형되어 영화롭게 될 것이다.

이 교리에 대한 근거는 바울이 말한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의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 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하신 말씀이다.

5)모든 신자들의 휴거가 이제 일어난다.

막 변형을 입은 살아있는 신자들과 함께 죽음에서 막 부활한 신자들은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구름 속으로 올리어 간다(살전 4:17). 그와 같은 “휴거”가 있을 것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다. 그러나 본인은 휴거라는 말을 따온 표 사이에 넣어서 시대구분론자들의 견해로부터 무천년설의 휴거의 개념의 차이를 구별코자 하였다. 시대구분론자들은 휴거 후 전체 교회가 천국으로 들림 받아 칠 년 기간 동안을 지낼 것이며, 이때 지상에 남은 자들은 대환란을 겪을 것이라고 말한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이와 같은 칠 년 기간이나 또는 이 시기에 교회가 지상에서 천국으로 옮길 것에 대한 성경적 증거를 보지 못한다. 신자들의 부활하여 영화롭게 된 몸들은 하늘에 속하지 아니 하고 지상에 속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서 “영접”이란 말로 번역된 말은(apantesis) 신약시 대 당시에 귀한 방문객에게 시(市)가 베푼 공개환영을 기술하는데 사용한 기술적인 용어이다. 사람들은 보통 귀한 방문객을 맞이하기 위하여 시를 떠나서 그분을 시 밖에서 맞아하여 도시로 돌아온다. 이 말이 가진 유사성에 근거해서 바울이 여기서 말한 모든 것은 부활하여 변형된 신자들이 구름 속으로 들림을 받아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주님을 맞이한다는 것이며, 이 마중 후에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지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함유하고 있다.

6)이제 최후의 심판이 뒤따른다.

시대구분론자들은 적어도 세 번의 분리된 심판이 있을 것으로 보통 가르치고 있지만,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 일어날 단 한번뿐인 최후의 심판이 성경적 증거를 갖고 있다고 본다. 모든 사람은 그때 그리스도의 재판석 앞에 나타나야 한다.

최후의 심판의 목적은 인간의 최종적인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우선적인 것 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아직 살아있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최종적인 모든 인간의 운명은 이미 그때까지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 다. 오히려 심판은 세 가지의 목적을 갖게 될 것이다. 첫째, 그것은 각 사람에게 할당된 최종적인 운명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둘째,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적군들 사이에 역사적인 큰 대조를 최종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지적할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그것은 각 개 인이 받을 상급의 정도와 징벌의 정도를 나타낼 것이다.

7)심판 후에 최종적인 상태가 시작될 것이다.

불신자들과 그리스도를 거역한 모든 자들은 지옥에서 영원토록 살 것이며, 한편 신자들은 새 땅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며 살 것이다. 새 땅의 개념은 성경적 종말론에 대단히 중요한 것이어서 우리는 스쳐 가는 생각 이 상으로 그것을 연구해야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들 자신들이 어떤 천상에서 영원토록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새 땅이 있을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있다. 계시록이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새 땅으로 내려올 것과(21:2), 하나님께서는 이제 사람들과 함께 당신의 거처를 가지질 것과(21:3),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새 예루살렘에 있을 것을 우리들에게 말할 때(22:3), 오는 세계는 하늘과 땅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합류할 것을 비유적인 언어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상태에서 영화롭게 된 신자들은, 하늘과 새 땅이 그때는 하나가될 것이기 때문에 하늘과 새 땅 모두에서 살게 될 것이다. 독자가 마음에 분명히 새 땅의 환상을 가질 때, 많은 성경적 가르침들이 하나의 중요한 패턴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본 대로, 몸의 부활은 새 땅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우주적인 중요성은 인간의 죄 때문에 피조물에 닥친 저주는 언젠가 제거될 것을 포함한다(창 3:17~19; 롬 8:19~22). 이 피조물의 새로워짐은 정말 새 땅일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또 새 땅에 관한 특별한 약속을 포함한다. 우리는 이미 65장 17절(66:22을 보라)에서 새 땅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을 보았다. 예수는 온유한 자가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마 5:5). 베드로는 의로움이 거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말한다(벧후 3:13). 계시록 5장에 기록된 하늘의 환상에서 요한이 본 장로들과 살아있는 생물들이 승리의 어린양에게 다음과 같은 찬양의 노래를 부른다. “. . . .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 하더라”(계 5:9~10).

새 땅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에 비추어서 가나안 땅과 하나님 백성의 미래에 대한 많은 구약성경의 예언들은 여기에 맞아떨어진다. 히브리서 4장으로부터 가나안은 도래할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안식처의 모형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배운다. 갈라디아에 보낸 바울의 서신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자들은 아브라함의 씨앗 안에 포함된다(갈 3:29). 우리가 이들 개념들에 대한 폭넓은 신약성경의 이해를 가지고 창세기 17장 8절의 말씀을 읽을 때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의 영원한 소유로서 새 땅에 대한 약속을 그 말씀 속에서 보게 된다. 그리고 이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아모스 9장 15절의 말씀을 읽을 때 (내가 저희를 그 본토에 심으리니, 저희가 나의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 하리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우리는 이들 말씀의 의미가 이스라엘 국가와 팔레스타인 영토에 제한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가 가나안이 하나의 모형인 새 땅에서 살게될 영원한 거주지에 대한 예언으로써 이해된다. 그러므로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이런 종류의 예언들의 성취를 준비하기 위하여 지상 천년왕국을 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그와 같은 예언들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기다리는 영화로운 영원한 미래를 지적하는 것으로써 본다.

전천년설 주창자들은 무천년설 주창자들이 미래의 왕국을 단순히 영적이고, 지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가르친다고 비판하는데, 무천년설의 견해를 올바로 알고 하는 소리로 볼 수 없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약속의 땅이 하나님의 백성의 영원한 소유가 될 것과, 이리가 어린양과 살 것과,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 지상에 충만할 것을 예언하는 구약성경의 예언은 단지 일 천년 기간동안만이 아니라, 영원토록 성취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믿기로는 이 해석이 그들의 의미를 최종적인 상태 전에 나타날 지상 천년왕국의 기술로 제한하는 것보다는 그들 예언들에 대한 더 부유하고, 더 넓고, 더 많은 관련성 있는 이해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무천년설 종말론의 몇 가지 암시들

결론으로 신학적 이해에 대한 무천년설 종말론의 몇 가지 암시들은 무엇들인가? 네 가지 것으로 설명 해보고자 한다.

1)신구약성경을 함께 묶는 것은 은혜의 계약의 통일성이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성스런 역사가 일련의 특출하고 공통성 없는 시대로 구분된다고 믿지 않으며, 전체 역사에 흐르는 단 하나의 은혜의 계약으로 본다. 이 은혜의 계약은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며, 새 땅에서 하나님과 그의 구속된 백성이 함께 하는 영원한 거처에서 정점을 이룰 것이다.

2)하나님의 왕국은 인간 역사의 중심이다.

왕국이 구약시대에 예언되고 마련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지상에 세워졌으며, 신약시대와 뒤따르는 교회시대 모두에로 확장되고 팽창되었으며, 결국 도래할 세상에서 완성될 것이다.

3)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주이시다.

이것은 모든 역사는 그리스도의 조종아래 있으며, 그의 목적에 보조적이었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입증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축복들을 누리는데 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분야에서 그리스도를 주로서 기쁘게 섬기는데 또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4)모든 역사는 우주의 완전 구속인 한 목표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

역사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각 개의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항상 구별할 수 없다할지라도, 우리는 역사의 궁극적인 결과가 무엇일 것인가를 안다. 우리는 새로워진 우주의 일부분으로써 새 땅을 학수고대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은 결국 그리고 완전히 하나님께서 그것을 존재케 하신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실 목적을 현실화시킬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세계 역사에 관하여 무천년설 주창자들이 냉정하고 현실적인 낙관주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현재의 통치에 있어, 하나님의 왕국의 임재에 있어서 그리고 목표를 향한 역사의 운동에 있어서 믿음은 이 세상의 죄의 존재와 사악한 왕국의 지속적인 발전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에 의해서 수반된다. 무천년설 종말론은 배교의 절정과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한 개인의 적그리스도의 최종적인 출현에 의한 환란을 기대한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완벽한 사회가 현 시대에는 현실화 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이긴 그리스도의 승리는 결정적이었으며, 그리스도는 현재 보좌에 알아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천년설 종말론의 지배적인 분위기는 낙천주의 즉, 기독교 낙천주의이다. 이것은 우리가 완전 무방비의 세계 위기나 절대적으로 뒤집을 수 없는 사회 경향은 없다고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 위에 세워지고, 사랑 안에서 그 자체를 표현하는 소망인 희망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무천년설 종말론은 우리에게 한 현실주의를 제시하며, 그러면서도 기본적으로 낙천적인 세계 및 인생관을 제시한다. 그것은 흥분되고, 생기 돌고, 도전적인 하나의 종말론이다. 그것은 역사를 지배하시는 그리스도의 주권과 그의 왕국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하나의 영감적인 환상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하나의 종말론이다.

‘회심 혹은 회개의 두 양상’, 유태화 교수

P1040285

유태화 교수님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taewha.yoo/) 참조

회심 혹은 회개라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이룬다는 사실을 앞글에서 언급했다. 하지만 기독교 내부로 들어와서 보게 되면 회심 혹은 회개라는 것이 두 다른 맥락으로 확장되어 이해된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된다. 그 하나는 율법적인 회심 혹은 회개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적인 회심 혹은 회개이다. 율법적인 회심은 중생의 조건으로서 기능하는 것이고, 복음적인 회심은 중생의 결과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다. 복음적인 회심에 대하여는 앞의 글(중생의 첫 열매가 왜 회심과 믿음일까?)에서 이미 어느 정도 거론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전자에 대하여 그 개략적인 이야기만 거론하도록 하겠다.

율법적인 회심은 율법과 복음의 극단적인 대조에서 기인한다. 기독교 역사상 율법과 복음의 가장 극단적인 대조는 마르시온(Marcion)에게서 비롯되는데, 알리스터 맥그로스(Alister McGrawth)에 따르면 그런 전통을 수용한 종교개혁가가 있는데 바로 그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라고 한다. 루터에 따르면, 율법은 신학적인 용도, 그러니까 몽학선생적인 용도로만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은 인간이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는데 얼마나 무능하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따라서 몽학선생으로서 율법 앞에 선 인간은 자신의 죄를 직면하고, 동시에 사망의 운명에 처한 자신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복음 안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소개하게 되는데 이 때 그리스도는 정확히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정확하게 성취하는 분으로 등장하고,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율법의 모든 정죄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을 끝장내는 분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환언하자면, 그리스도는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을 궁극적으로 완성하여 폐기하는 분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몽학선생으로서 율법과 그리스도는 정확하게 대척점에 서 있게 된다. 동시에 극명하게 자신의 역할을 성취한다. “정죄”와 그 “정죄를 무화(無化)시키는 일”말이다.

이 긴장이 기독교의 핵심을 구성한다고 믿었고, 이 긴장은 모든 죄인에게 제시되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실제로 죄의 굴레에 에워 쌓인 인간에게 이 두 긴장을 간직한 기독교적 메시지가 선포된다(소명). 그리고 선행하는 성령의 은혜가 역사한다(선행적 은총-prevenient grace). 성령은 죄인의 잠자던 인식이 살아나도록 은혜를 베풀되, 이 은혜는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역사한다. 따라서 인간은 몽학선생으로서 율법 앞에서 자신의 죄를 직면하게 되고, 사망에 매여 종노릇 하고 있는 모습을 인식하게 된다. 동시에 복음 안에 계시된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정죄도 사망의 운명도 벗겨진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된다.

정확히 이 인식의 지점에서 성령은 뒤로 물러나고, 인식의 주체로서 인간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 죄에서 돌아서는 인격적인 회심을 하게 되고,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약속된 구원의 약속을 굳게 믿고 붙잡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격적인 회심이며 동시에 믿음이다. 이 회심과 믿음이 조건이 되어서, 죽음에서 생명에로 넘어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중생이다. 그러니까 회심과 믿음은 중생을 이루는 본질적인 요소로 기능하게 된다. 환언하여 만일 인간이 회심과 믿음이라는 인격적인 자기 결정을 하지 않는다면 중생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회심과 믿음은 중생의 본질적인 조건으로 기능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소명-회심과 믿음-중생-성화라는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을 이루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조건으로서 기능하는 회심과 믿음이 중생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율법적인 회심이라고 부른다. 중요한 것은 율법적인 회심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계속해서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구원의 서정에서 이런 생각을 반영하는 핵심적 국면이 성화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쉽게 말하여 성화의 삶을 살아갈 때도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은 지속적으로 선포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선포되는 율법을 인하여 자신의 죄인됨을 반복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회개와 함께 그리스도 안으로 회귀하게 된다. 이 삶을 반복해서 살아가게 되면, 성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화는 반복적으로 죄를 인식하고 그리스도에게로 귀의하여 그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이다. 얼른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지게 되었을 때를 상정해놓고 그 구조 안에서 성화를 생각하게 되면 아주 이상한 지점에 이르게 된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데, 그 발이 미끄러져 죄를 짓고 타락에 떨어졌다면, 이제 그에게 몽학선생으로서 율법과 그 율법을 완성하고 폐기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새롭게 자신을 발견하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이 선포되는 기독교적 메시지의 핵심을 사용하여 은혜를 베풂으로써 타락한 인간은 다시 새롭게 회개와 믿음이라는 반응을 구체적으로 보여야만 한다. 이것은 중생에 이를 때와 동일한 조건에서 일어나는 인격적인 반응이다. 이 인격적인 반응이 수반되어야만 중생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회개와 믿음을 보이지 않으면, 중생은 취소되는 것이다. 일시적인 타락이 영원한 타락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회개는 율법적인 조건으로 기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복음적 회개의 또 하나의 특징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한다. 율법적인 회개에서는 은혜의 조건성이 핵심을 이룬다면, 복음적인 회개에서는 은혜의 불가항력성이 핵심을 이룬다. 율법적인 회개를 말하는 경우나 복음적인 회개를 말하는 경우나, 모두가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사실은 중생한 그리스도인도 죄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성령이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여 지은 죄를 일깨운다는 사실도 동일하다. 하지만 이 성령의 사역의 성격이 율법적인 회개와 복음적인 회개에서 근원적인 차이를 일으킨다. 율법적인 회개에 대하여는 상기했으므로, 복음적인 회개에 대해서만 설명하도록 한다. 복음적인 회개에서는 성령이 두 가지 차이를 일으키는데, 그 하나는 성령이 사용하는 은혜의 수단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베푸시는 은혜의 성격에 대한 것이다.

은혜의 수단인 하나님의 말씀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경우, 즉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경우, 몽학선생으로서의 율법이 아닌 규범으로서의 율법이 작동하게 되는데, 규범으로서의 율법은 그리스도 예수와 정상적인 관계에 있는지 비정상적인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능을 수행하며, 사망에 이르는 정죄를 일삼지는 안는다. 이 때 성령이 규범적인 율법을 사용하여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이 비정상적인 상황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데, 일깨우는 정도가 두 다른 단계를 이룰 수 있다. 하나는 인격적인 회개를 통하여 돌아오도록 성령이 감동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자의 방식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 인간의 의지를 어거하여 순종하도록 바꾸는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개입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를 어거하는 방식은,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죄를 인식할 수 있는 환경적인 것들을 강제함으로써, 성령이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돈줄을 옥죄이기도 하고, 건강을 잃게도 하고, 주변의 인적구성원을 동원하기도 한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도록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격적인 회개를 하도록, 그래서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연합에 이르도록 일깨운다는 말이다. 물론 이 일은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하시는 일이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라고 언급한다(히 12:7-9).

비록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누구나 다 범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삶의 질곡에서부터 인격적인 회개를 이루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며, 또한 참 귀중한 일이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규범적 용도로서 율법, 곧 십계명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를 정확히 보여줄 때, 그 안내를 따라서 자신의 삶의 자리를 교정하고, 삶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예수와의 인격적인 연합을 더욱 공교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친 백성의 길을 새롭게 결단해야 한다. 간혹 삶의 중심에서 멀어져서 십계명이 열어 보여주는 삶을 지향(志向)하지 못할 때,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함으로써 다시 중심으로 돌아서는 일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특별히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를 힘쓰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본질적인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이 자녀의 길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유한 아들이 걸어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중생의 첫 열매가 왜 회심과 믿음일까?’, 백석대 유태화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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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acebook.com/taewha.yoo/ 참조

중생은 사도 요한의 해석에 따르면 성령께서 물로 씻듯 인간의 마음에서 그 부패성을 씻어내고, 새롭게 한 일로 보아야 한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본성의 부패와 오염을 경험하면서 지정의에 심각한 결함을 갖게 된 인간에게 복음이 들려질 때 성령이 내적으로 인간을 소명하는데, 이 내적인 소명은 인간이 항거하지 않고 복음 안에 계시된 그리스도에게로 인격적인 전환을 이루게끔 하는 성령의 사역이 그 핵심을 이룬다고 할 것이다. 중생은 인간의 지성을 밝혀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게 하는 사역이면서, 그 사실에 깊은 감동과 함께 마음으로 공감을 이루게 만드는 사역이기도 하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삶의 태도를 바꾸는 행위를 내포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따라서 중생한 인간은 성령의 역사를 좇아 그리스도와의 깊은 인격적인 연합을 이루게 된다. 소위 말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게 되는 일이 성령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을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unio mystica cum Christo)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신비적(mystica)이라는 말은 “성령을 통하여”라는 뜻이다. 이렇게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인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나는 두 가지 뚜렷한 인격적인 반응은 회심과 믿음이다.

중생의 결과가 왜 회심과 믿음일까? 조직신학, 특별히 구원론을 오랫동안 강의해오면서 갖게 된 깨달음은 이것이다. 이 두 반응이 나타나는 핵심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 때문이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이후 기독교가 견지해온 구속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파악하는데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랑이면서 동시에 공의로우신 분이다. 아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범죄한 후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되어야만 했으나, 아담에게 속한 그 누구도 이 조건을 만족케 할 존재가 없었고, 바로 그런 이유로 성자의 성육신이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해야만 했는데, 그 공의는 무엇보다도 죄에 대한 것으로 표현되어야 했다. 그러한 이유로 그리스도는 아담의 자손의 죄를 대신 걸머지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대신 걸머지고 하나님의 심판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또한 아담과 달리 아담의 자리에서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데, 그것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삶의 특징이었다. 달리 말하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유일한 하나님임을 신뢰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이었다. 그 깊은 신뢰로부터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으며, 이 세상의 피조물 가운데 하나로 하나님을 평가절하하지 않으며,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고, 자신의 창조주로 인하여 쉼을 누리며,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이웃을 제 몸처럼 대하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 예수는 참 인류의 새로운 머리로서,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이웃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분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바로 이 사랑의 삶을 살아낸 분으로서 십자가를 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삶인지를 몸소 보여주었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이유로 인하여 그리스도 예수와의 신비적인 연합인, 중생에 이르게 되면, 그리스도인이 회심과 믿음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조금 쉽게 말하자면,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의 깊은 연합을 말씀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이루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알아가게 되기에, 죄로부터의 인격적인 돌이킴을 보이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부르시고 중생에 참여하게 하시는 일은, 인간이 여전히 연약하고 죄인되고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서 일어난다. 죄인에게 죄를 다 씻고 오라고 말하지 않는다.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단 처리하시고, 그것에 근거하여 의로운 자로 간주하시어 당신의 자녀로 인정해주신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리스도야말로 바로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은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깊이 이해한 그리스도인은 인격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죄에 대하여 돌이키는 회심의 자리에로 나아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와 성령을 통하여 깊이 연합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헌신을 보이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리스도 예수의 삶을 깊이 묵상하면서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낸,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분임을 그리스도인이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삶의 특징을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을 통해서 깊이 체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깊은 신뢰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사신 삶 안으로 걸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삶을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게 되는데, 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장 소중하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창조와 구속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임을 명확하게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 예수와 성령을 통하여 연합된 그리스도인이 인격적인 회개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그의 삶에서 보이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인격적인 회심이 없는 그리스도 따름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인을 부르시지만, 그렇게 부름을 받은 죄인은 그리스도 예수와의 깊은 연합 가운데서 죄를 인식하고 죄를 떠나는 인격적인 결심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부르시며 용서하시되, 다시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은 금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정한 세 수 그 이상으로 토색한 삭케오를 용서하며 부르셨지만, 잘 차려진 밥상에 올라온 진미를 드시면서 누구의 고혈을 빨아 먹는 것인지 알아듣게 만드셨고, 그 결과로 인격적인 회개를 하도록 하셨다. 살인자 바울을 부르시고 구원과 이방인을 위한 귀한 직임을 맡기셨지만, 남은 생을 살아가면서 그 죄를 인한 깊은 회개가 동반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셨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과거의 삶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근거한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주와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 안에 터 잡고 형성해온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삶에서 돌이켜서 하나님 안에 깊은 신뢰를 둔 삶, 그를 신앙하는 삶을 살아가가는 전향적인 인간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고,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주요 또한 온전케 하시는 이인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와의 깊은 인격적인 교제를 이루면서 그분의 삶 안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은혜의 수단인 하나님의 말씀을 잘 활용하면서 부지런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삶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파악해야 한다. 성령의 깊은 감동과 함께 그의 인도를 기뻐하며 그 삶이 자신의 삶 가운데 형성되기를 위하여 애를 써야 한다. 피 흘리기까지 옛 삶의 관성에 저항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를 죽여야 한다. 이런 옛 습관을 끊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마귀와 그의 졸개들의 미혹을 딛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밝히 드러난 삶, 곧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빚쟁이 혹은 그만큼의 죄를 용서받은 죄인처럼, 그 탕감받은 것, 용서받은 것, 바로 그 근원적인 경험에서부터 일어나는 일이다. 그 은혜에 감사하는 근원적인 삶의 자리를 잃지 않으면서, 아니 더 적극적으로 바로 그 은혜의 자리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는 삶이다. 회심과 믿음은 용서와 은혜라는 그 근원적인 나무에서 필연적으로 맺힐 수밖에 없는 열매인 것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어떤 의미에서 회개의 의무를 지닌 특이한 공동체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공동체의 구성원은 누구도 상대방의 멱살을 거머쥐거나 구타하면서 회개를 요청할 수 없으나, 누구나 스스로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의 의무를 걸머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때, 그를 위하여 기도할 의무를 걸머지고 있을 뿐이다. 그의 죄로 인한 어려움을 공유하며 함께 애통해 할 수는 있으나, 끝까지 그를 놓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 마땅히 회개해야 할 중대한 죄를 고백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을 때,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권면했듯이 회개를 기대하면서 그의 영혼을 사탄에게 내어주는 일이 있을지라도 말이다.

청교도들의 준비론, 코 해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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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parationism As Taught By The Puritans, Cor Harinck
청교도들의 준비론, 코 해링크

세례요한은 네가 누구냐는 질문에 “나는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대로 주의 길을 곧게 하려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요한복음 1:23) 라고 대답하였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심을 알기 전에 먼저 회개하라고 설교하였다. 준비론에 대한 청교도 교리는 세례 요한의 이런 증거에 기초하고 있다. 청교도들은 이것이 설교의 바른 방법이라고 믿었다. 청교도들은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영혼이 준비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어떤 죄인도 무의식적으로 믿지 않는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성령이 마음속에 역사하신 결과이다.

청교도의 준비론에 대한 정의

(준비론에 대한) 두 가지 오해를 먼저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 청교도들이 중생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준비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죄인이 스스로 중생을 위하여 준비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위하여 스스로 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청교도 전통에서 낯선 것이다.

중생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지속된 개혁”의 화란 신학자들과 청교도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화란 신학자들은 중생을 은혜의 생명이 시작되는 시점, 즉 영적 각성과 확신이 시작되는 첫 순간으로 정의한다. 화란 신학자들은 신적 관점에서 중생을 본 것이다. 영국 신학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최초의 믿음의 행위 시에 중생이 일어난다고 상정한다. 영국 신학자들은 (중생을) 사람의 관점에서 보고 그리스도인은 죄인이 처음 믿을 때 태어난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영국 신학자들은 중생을 위한 준비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위한 준비로 본다.

청교도들이 중생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를 말할 때, 사람이 스스로 준비할 수 있음을 의미한 것이 아니다. 그 반대이다. 청교도들에게 “준비”라는 말은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일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전적으로 부적합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일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을 위하여 준비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선포를 시작하실 때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복음 1:15)고 외치셨다. 이 선포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의 메시지를 요약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며 내적인 변화를 체험해야 하고 그리스도 안의 구원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 또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사람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이것이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얻도록 (사람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방식이다.

이것이 개혁신학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위한 마음의 준비에 대한 교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최초로 진술하였고 나중에 더 풍부하게 발전되었다. 우리는 율법과 복음에 대한 마틴 루터의 가르침에서 이 사실을 발견한다. 루터는 하나님은 믿음으로 죄인을 의롭다하시는 일을 하시기 전에 율법으로 먼저 죄인의 마음을 겸비하게 하신다고 가르친다. 칼빈도 사람이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고 전적으로 겸비해지지지 않는다면 구원의 길이 열리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율법은 은혜를 위하여 죄인을 준비시킨다고 강조한다. 루터와 칼빈을 통하여 어거스틴과 (영국의) 청교도들 그리고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사이에 연관성이 나타난다. 그런데 왜 청교도들은 그렇게 명백하게 준비론에 집중하였을까?

먼저, 주된 이유는 청교도들이 회개와 믿음에 대한 (사람의) 의무를 강조하여 설교한다는 사실에 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영원히 멸망한다고 끊임없이 회중들에게 설교하였다.(사도행전 20:21) 청교도들은 회개의 필요성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속적으로 설교하며 하나님이 그것을 요구하신다고 설교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라는 가르침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신다. 청교도들은 요한1서 3:23의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고 요한복음 6:29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는 말씀이 이런 가르침을 지지한다고 주장한다.

청교도들은 이런 설교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주와 왕으로 받아들이도록,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의 양심에 촉구한다고 믿는다.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 (마가복음 16:16)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말씀을 들고도 회개하지도 믿지도 않은 모든 사람들을 문책하시는 날이 올 것이다.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참된 신자들로 이루어진 교회를 세운다는 이상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런 요구를 더욱 강조하였다. 1630년에 뉴잉글랜드 설립자들은 교회의 회원권이 자기들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설명할 수 있으며 거룩한 삶에 공적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져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이것이 교회 회원이 되는 것과 식민지 정부에 참여하는 전제조건이었다.

이러한 요구로 교회의 회원들은 엄청난 부담을 가지게 되었다. “거듭나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여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가?” 이것이 문제였다. 이로 인하여 청교도들은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하는 지침을 만들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어떤 종류의 지침을 만들었는가? 청교도의 조상인 윌리엄 퍼킨스는 “자신의 영적 빈곤과 비참함, 특별히 자신에게 내재하는 부패함, 불신앙, 교만 그리고 자기 사랑을 깨닫도록 애를 쓰라, 그러면 자신의 비참함을 씻기 위하여 예수님의 핏방울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며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게 (회심을) 촉구하였다. 각주1 퍼킨스의 영적 상속자들은 이것을 더욱 풍부하게 발전시켰다. 심지어 그들은 일련의 지침서를 만들 정도였다. (대표적인 청교도인) 자카리 크로프톤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첫 번째, 겸비한 양심으로 진리의 말씀과 은혜의 복음 아래 조심스럽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복종하라.

두 번째,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숙고하라. 하나님의 거룩하심, 능력, 의로우심, 은혜 등과 같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숙지하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존경하기 전에는 결코 죄를 떠나거나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없다.

세 번째, 심각하게 자신을 검토하라. 자신의 영혼과의 그러한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최악의 모습을 보게 되면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자신을 검토하라.

네 번째, 점점 세상과 결별하라. 참되게 회개하는 자는 세상에서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

다섯 번째, 삶이 덧없음을 생각하라. 나중에 회개할 시간이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오래살기를 바라던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최후를 맞는다.

여섯 번째, 심판의 날이 곧 닥칠 것을 엄숙하게 생각하라.

일곱 번째,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죄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 회개하는 마음과 겸비한 심령으로 찾는다면 구원은 분명히 얻을 수 있는 축복이다.

여덟 번째, 자신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피로 흠뻑 젖게 하라. 매일 골고다를 묵상하라

아홉 번째, 절박한 심정이 있으면 회개에 이르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지체하지 말라, 죄와 결별하는 것을 지체할수록 회개하기 더욱 어려워 질 것이다.

열 번째,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회개와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이것에 덧붙여 “하나님께 이런 은혜의 방편들에 복주시기를 구하라 그리하면 돌 같은 자신의 마음이 제거되고 진리 안에서 회개를 위하여 필요한 은혜를 얻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각주2 이런 방식으로, 청교도들은 듣는 자들을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청교도의 준비론의 신학적 배경

이 모든 경고와 책망에 대한 근본적인 신학은 다음과 같다.

1. 청교도들은 사람의 책임을 믿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더불어 사람의 책임을 옹호하였다. 죄인은 자신의 마음을 바꿀 수 없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바꾸시려 사용하시는 은혜의 수단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사람이 성령의 바람이 불게 할 수는 없지만 성령의 바람이 불 때 돛을 올릴 수는 있다.

2. 청교도들은 지성의 중요성을 믿었다.

청교도들은 이성적 피조물인 사람은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청교도들은 모든 은혜가 지성을 통하여 마음에 들어온다고 믿었다. 청교도들에게 마음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은 지성을 통하는 것이었다. (의지를 강조한 윌리엄 에임즈는 청교도 전통의 특징을 다소 벗어난다.) 하나님은 사람을 강제로 움직이시기 보다는 지성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에게 말씀으로 다가 오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에 권고를 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설득하시며 찾으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권유하시며 각성시키심으로 하나님을 찾게 만드신다. 코튼 매더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바꾸실 때, 하나님의 영은 이성이 없는 목석처럼 우리를 다루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사람으로 다루시며 사람에게 맞는 방법으로 우리를 이끄신다.”고 생각하였다. 각주3

3. 청교도들은 타락한 사람이 선과 악을 증거하는 양심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청교도들의 설교의 주된 목표는 양심을 각성시키는 것이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하신다고 믿었다.

성령께서는 양심을 통하여 특별히 사람의 영혼에서 죄를 깨닫도록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청중의 양심을 겨냥하여야 한다. 청중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양심을 찌르게 된다.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갈 때, 그들의 양심은 괴로움을 당하여 하나님과 직면하여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심에 권고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에 도달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4. 청교도들은 설교의 중요성을 믿었다.

성령께서는 말씀의 설교에 자신을 속박시키신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로마서 10:17)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부라고 기대하였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충성스럽게 선포하는 설교자의 소명,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종들에게 설교를 명하셨는데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교회를 모으신다.

동시에, 청교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믿었다. “설교자들은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고, 성령께서 열쇠로 문을 여신다.” 이렇게 생각하고, 청교도들은 청중들의 마음, 의지, 그리고 양심에 설교로 다가갔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마음을 조명하고 의지를 새롭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청교도들은 마음과 의지를 사로잡기 위하여 죄인들에게 권고하였다. 청교도들은 이성적인 논증으로 죄인들에게 다가가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그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분명히 전하였다.

5. 청교도들은 회심을 하나의 과정으로 보았다.

준비론의 교리는 청교도가 경험하는 회심의 한 요소이다. 청교도들은 회개를 영혼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준비되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모든 신자는 예비적인 노력을 경험한다고 믿었다. 그리스도께 인도되며 영혼의 안식을 위하여 건너는 길 있는데 그것은 죄를 확신하고, 행위 언약에 대하여 죽으며, 마음이 겸비해지는 길이다.

청교도들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준비론에 익숙하였다. 하나님께서 청교도 설교자들을 이 문제들에 관해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청교도들이 많은 분투와 의심 끝에 그리스도 안에 안식을 발견하였는지에 대하여 수많은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있다.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길을 찾도록 도와주려고 애썼다. 청교도들이 회심과 관련된 경험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로 인하여 청교도들의 설교가 목회 중심적이 되었다. 청교도들은 사람들이 직면하는 어려움들을 해결하는데 목표를 두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성령의 내적 역사를 강조하였다.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되는 일에 영혼이 준비되는 다양한 단계에 대하여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있었다. 윌리엄 퍼킨스는 중생의 과정을 여덟 가지 단계로 기술하였다.

a. 말씀을 들음

b. 율법의 요구에 주의를 기울임

c. 개인적 죄를 생각함.

d. (죄의) 확신을 경험함

e. 복음의 약속을 묵상함

f. 복음의 약속들을 믿고 받아들임

g. 죄에 대하여 슬퍼함

h.새로운 순종의 생활을 함

토마스 후커나 토마스 쉐퍼드와 같은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참으로 영접할 수 있기까지 죄를 어느 정도 확신해야만 하는 죄인의 내적 경험에 주로 집중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실제적이 되기까지 모든 죄인들은 어느 정도의 겸비와 영적 고통을 경험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그런 극단적인 견해 중 하나를 토마스 후커가 주장하였는데, 그는 죄인은 깊이 겸비해 져야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런 견해에 반대한 사람들이 있는데 잘 알려진 존 코튼, 코튼 매더, 길레스 훼르민 그리고 리처드 십스가 그들이다. 그들은 후커와 쉐퍼드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다양한 방법이 있음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모든 준비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는 “율법 행위”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잘 알려진 안네 허치슨은 존 휠라이트와 존 코튼과 함께, 준비론자들이 행위 언약을 가르친다고 비난하였다.

복음을 믿는 일에 일반적으로 앞서는 “율법의 행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청교도들에게 공통적이었다. 그러나 율법을 통하여 죄를 확신하는 것은 복음적 문맥 안에서만 작용하는 것이다.

즉 율법의 목적은 죄인을 그리스도께도 인도하는 것이다. 의견의 차이에 관계없이, 모든 청교도들은 길든지 혹은 짧든지 마음의 겸비함과 회개, 죄의 확신이라는 “준비하는 일”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선행한다고 믿었다.

청교도들은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성령이 주시는 참된 구원의 은혜로 생각하였다. 청교도의 입장은 중생이 그리스도에 대해 최초로 믿음이 활동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다른 활동은 단지 일반적이고 준비적인 것일 뿐이다. (믿음의 활동외의) 모든 다른 활동은 은혜의 열매가 아니다. 즉 배교자조차도 그런(모든 다른 활동)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일반적인 역사는 종종 구원의 역사에 앞선다. 청교도들의 견해는 그러한 준비하는 일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끝나야 한다는 것이다.

청교도의 준비론이 주는 교훈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두 가지 가장 중요한 교훈을 강조하겠다.

1.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전에 어느 정도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단정하였다. 본질적으로 죄인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에 부적합하고, 무능하며, 배타적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일을 대적하는 많은 장벽이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타고난 율법주의와 은혜로 받는 구원에 대한 혐오가 상당히 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방법을 따라 구원을 얻는 일에 대한 무지와 맹목이 상당히 있다. 높은 산과 같은 교만이 평탄하게 되어야 만하고 깊은 계곡과 같은 무지, 좌절, 낙심이 메꾸어질 필요가 있다. 죄인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께 가는 길이 닦여져야만 한다.

2. 청교도들은 구원의 필요성을 확신해야한다고 믿었다. 자신이 죄와 비참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함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누구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화목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나아오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비참에 대한 인식 없이는 누구도 그리스도를 찾거나 귀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므로 비참을 인식하는 것은 믿음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비참에 대한 인식은 믿음 이전이나 이후에 오기 보다는 믿음과 함께 온다. 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높이 들린 놋뱀을 바라보았듯이 자신이 죄인인줄 아는 자가 믿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건강한 자는 의원이 필요 없지만 병든 자라야 의원이 필요한 것이다”(누가복음 5:31)

왜 구세주가 필요한지도 모르는 청중들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음을 믿으라고 촉구하는 현대 복음주의자의 메시지와 성경적이고 개혁적인 설교를 구별하는 요소가 바로 이것이다. 이런 차이점에서 성경적 설교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세상에 증인이 되라는 성화만을 강조하는 설교가 구별된다. 그런 설교자들은 골고다의 그리스도를 부인하면서 산상수훈의 그리스도만 주로 강조한다. 그런 설교자들은 산상수훈에 어울리는 삶을 살기 위하여 먼저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가져야한다는 것을 망각한 것이다. 성화가 칭의 앞에 올 수가 없다. 그러한 설교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정죄되고 상실된 죄인이며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 되어야 한다는, 사람이 처한 곤경의 핵심을 무시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알기 위해서는 죄를 드러내는 율법에 직면하여야 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죄와 비참이 얼마나 심각하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이점을 납득하였고, 그러므로 우리는 청교도들에게 많은 것을 계속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준비론을 설교하는 방법

그리스도를 위하여 마음이 준비되어야 한다는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 앞에 회개한 적도 없는 죄인들이 예수를 영접한다고 주장하는 피상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오직 죄와 비참을 깨닫는 것에 집중하여 죄를 드러낼 필요성을 단호하게 강조하는 방식으로 설교할 수 있다. 청중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는지 반복적으로 상기시킬 수 있다. 설교할 때마다 사람은 영적으로 죽었고 믿음과 회개에 무능하다고 강조할 수 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야 하며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단호하게 가르칠 수 있다. 경험적인 정통(교리)의 관점을 따라서, 예수님을 위한 (마음의) 자리가 마련되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간과하고 영생을 얻는다고 스스로 속임으로, 멸망할 것이라고 강조할 수 있다. 이런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그래서 율법을 설교해야 하는 필요성을 충족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앞선 준비하는 일을 충분히 전달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청중들이 자신들의 죄와 비참을 깨달을 것인가? 이런 방식이 청중들에게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보여줄 것인가? 이렇게 하면 청중들이 “오 하나님 자비를 베푸소서! “ 라고 부르짖게 할 것인가? 비참하고 타락한 상태에 대한 일반적인 진리를 들려주어도 사람들은 뜨뜻미지근할 것이다. (진리에) 끄덕거리며 동의하지만, 청중들은 진리는 지나쳐 버리고 정통적인 설교를 들었다고만 말할 것이다. 죽은 정통 속에서 그들의 마음은 딱딱해질 것이며, 그저 ”예수를 영접한“ 많은 사람들과 달리 자신들은 피상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설교로 청중들로 하여금, 죄인들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부르짖게 만드는 영적인 고통을 쉽사리 느끼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식은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참된 필요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렇다면 적절한 접근방법이 무엇인가? 사람의 타락한 상태를 차갑게 정통(교리)적으로 묘사하는 식으로 비참에 대한 설교를 할 필요는 없다. 율법에 대한 설교는 잠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기 위한 호소로 사용하여야 한다. 율법에 대한 설교는 자신의 실상을 드러내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율법을 설교하는) 특정한 목적은 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자신들이 처하게 되는 위험을 직면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자문해 보는 것이 유익하다. 죄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죄를 깨닫는가? 어떻게 누군가가 구세주를 바라게 되는가? 성령은 무엇을 사용하여 죄를 깨닫게 하시는가? 이런 질문에 사도는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다.”고 대답한다.(로마서 3:20)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직면함으로써 우리는 죄를 알게 된다. 이렇게 청교도들은 진지하고 단호하게 설교하였다. 청교도들은 맥케인의 유명한 시에서 말한 것을 사람들이 느끼게 만들었다.

율법의 공포가 엄습하므로 나는 두려워 떨었노라
나에게 피난처도 안전도 찾을 수 없네.

청교도들은 종종 죄를 (구체적으로) 거명하면서 율법을 선명하게 설교하였다. 청교도들은 간통이나 간음 같은 노골적인 죄뿐만 아니라 험담과 비방, 교만, 돈을 사랑함, 자랑함, 결혼과 가족관계 안에서의 폭력적 행동 같은 죄도 언급하였다. 청교도들은 특별히 완악함과 불신앙의 죄를 강조하면서 인간 존재의 전 영역을 하나님의 거룩한 법의 지배아래 두었다. 청교도들의 목적은 이중적이었다. 첫째는 청교도들은 청중들이 회개와 믿음의 요구에 직면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이 악한 길에서 떠나 그의 아들의 구원하는 복음을 믿기를 요구하시며 만일 회개하고 믿지 않는다면 심판하실 것이라고 알려주었던 것이다. 청교도들이 회개와 믿음을 요구한 것은 단순히 바르고 지혜로운 어떤 상담을 제공하거나 “하나님이 당신을 회개케 하시고 믿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는 간절한 열망을 표현한 것이 아니었다. 청교도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요구인,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마가복음 1:15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청교도들은 마음의 완악함과 불신앙의 원인은 사람의 무능만이 아니라 사람이 죄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임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율법을 설교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는 청교도들에게 배워야 한다. 얼마나 청중들은 자신들의 무능이라는 요새에서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왔는가! “나는 스스로 회심할 수가 없으므로 회개할 필요가 없다. 나는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복음에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청중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희생물이 아니라 완악한 자요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것이 바로 청중들로 하여금 회개와 믿음의 요구에 직면케 해야 하는 이유이다.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얼마나 신실하시며, 예수의 피를 무시하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를 선포함으로 이것이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이적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다면 그들이 이미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마11:22) 이 말씀에는 복음의 거룩한 열심이 나타나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복음 설교의 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 얼마나 중요한가!

청중들에게 율법이라는 거울을 들이대지 않으면,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는다면, 복음에 반응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청중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청중들이 복음의 가치를 알고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하시는 그리스도를 찾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로, 청교도들은 죄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고 하였다. 청교도들은 그리스도가 잃어버린 죄인들을 위한 완전하고 자비하신 구주이심을 설교함으로 그렇게 하였다. 청교도들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약속과 초대를 통하여 죄인의 구주로 자신을 주셨는가를 나타내 보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모든 필요를 능히 채우실 수 있는 분이시다. 청교도들은 불신앙의 정체가 최악의 죄임을 드러냄과 동시에 못 박히신 구주의 놀라운 능력을 강조하였다. 죄와 불신앙으로 인하여 마음이 고통으로 찔림을 받은 후에, 청교도들은 창에 찔려 허리에서 피와 물을 쏟으심으로 속죄의 피와 씻기는 물이 되신 구주를 죄인에게 알려준다.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마음과 양심에 호소하여 죄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죄인에게 증거하고 죄인 앞에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모든 충족성과 자비를 제시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라디아 4:19) 라는 바울의 말을 청교도들은 상기시킨다.

준비론에 대한 경계

준비론의 교리에 대한 위험성이 있다. 준비론은 복음을 조건적으로 변질시킬 수 있고 실제 그런 일이 발생하였다. 그런 준비는 어떤 기준에 맞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미 언급한 토마스 후커와 토마스 쉐퍼드는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경험해야 하는 어떤 단계, 즉 율법으로 죄를 깨달음, 마음의 회개와 죄의식, 저주와 형벌에 대한 복종으로 나타나는 하나님 앞에서의 궁극적인 자기 비하에 관하여 말하였다.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갈등과 혼란을 겪었으며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절망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특히 후커가 주장하는 겸비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었다. (후커의 주장에 의하면) 겸비가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토마스 굿윈은 “이제 회심한 당신이 우리의 어린 시절에 살았다면 당신은 우리가 죄를 위하여 겸비케 하는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각주 4

쉐퍼드와 후커는 위대한 영적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그 분별의 목적은 죄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오직 겸비해진 죄인만이 그리스도를 높이게 될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단계의 경험을 거의 필수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서 그들은 가난하고 회개하는 죄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길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집중하기 보다는 자신들을 준비하는 행위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코튼 매더는 쉐퍼드의 글을 참된 신자의 대작이라 불렀지만 마음의 겸비를 위한 필요조건을 규정한 것 때문에 회개에 관한 쉐퍼드의 책에 대해 심각한 의구심을 가졌다.

어떤 사람들은 준비하는 행위를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조건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하여 스스로 준비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앞서는 준비하는 일로 모든 초점이 옮겨졌다. 결과적으로 많은 청중들이 “나는 충분히 겸비해졌는가? 나는 복음을 정말 믿는가? 내가 그리스도께 진정 나아가는가?” 라고 반복적으로 자문하게 되었다. 많은 청교도들은 목회적 방식으로 회중들을 대하였고, 영혼의 참된 의사로서 사람들을 속박하는 매듭을 풀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적합성보다 필수조건의 적합성에 더 주목하였다.

코튼 매더는 “예수님이 두 강도 사이에서 못 박히신 것처럼 값없는 은혜의 교리가 법적 요구와 법적 적합성 사이에서 못 박혔다.”고 말했다. 각주5 이 말은 모든 준비론을 율법 행위로 일축해버린 안네 허치슨을 둘러싼 논쟁의 영향력을 드러내지만, 이 말에는 여전히 진리의 요소가 있다.

준비 행위의 교리가 은혜를 받기 위하여, 그리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믿기 위하여 충족시켜야 하는 조건으로 변질된다면 그것은 고통 받는 영혼에게 해로울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일이 오늘날도 일어나고 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하여 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수적이라고 한다면 죄인은 자신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균형을 잡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죽으셨음을 믿으시오” 라는 극단에 반대하여 “(죄를) 확신하며 자신의 의로움이 영적으로 벗겨지는 어떤 단계를 통과해야만 복음의 약속을 믿고 그리스도께 나아갈 것이다. 라는 다른 극단에 서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를 위한 (마음의)자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우리가 의지하는 기초와 조건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것만 아니라 죄에 대한 지식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근거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회개하는 죄인이 자신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주목하는 대신에 “내가 충분히 반성했는가? 충분히 교통을 받았는가?” 이런 질문에 전적으로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복음의 자유는 가려지고 회개하는 죄인은 어떻게 그리스도께 나아갈지 거의 알지 못하게 된다.

준비의 필요성을 가르치는 목적은 이런 것이 아니다. (준비의 필요성을 가르치는) 목적은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와 비참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저주받은 죄인이며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죄인임을 경험적으로 인식하게 하려는 것이다. (준비론)의 목적은 영혼이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게 만들어 죄인이 복음의 단순한 조건으로 구원받기를 원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영혼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든 준비는 하나의 목적, 즉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가난하고, 죄인이며, 무가치한 자임을 알고 그리스도께 나아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죄인을 사로잡아 주와 구주이신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이다. 진정으로 준비된 영혼은 어거스투스 탑레이디와 함께 이렇게 고백할 것이다.

나 가져갈 것, 아무것도 없네.
오직 붙들 것은 십자가 뿐
벌거벗은 나, 옷 입기 위하여 주께 갑니다.
소망 없는 나. 주님 은혜 바라나이다.
더러운 나, 씻기시는 샘으로 달려가나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나, 구주여 씻으소서

‘기도’, 헨리 나우웬 중에서

SAM_0809

우리가 진정 갈망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 자신의 가장 깊은 동경과 다른 이들의 동경을 귀기울여 들어보면, 인간 심령의 갈망이 가장 잘 압축된 단어는 ‘연합’이다. 연합이란 누군가 대상과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전한 연합을 찾기 전에는 쉴 수 없는 마음을 주셨다. 우리는 우정과 결혼관 공동체에서 그것을 찾으려 한다. 친밀한 성관계와 환희의 순간과 재능의 인정에서 그것을 찾으려 한다. 성공과 명예와 보상을 찾으려 한다. 어디를 보든 우리가 진정 구하는 것은 연합이다.

연합의 갈망은 하나님이 주신 갈망이다. 넘치는 기쁨뿐 아니라 지독한 고통을 유발하는 갈망이다. 예수님의 우리의 연합의 갈망이 헛된 것이 아니라, 그 갈망을 심어주신 분을 통해 채워진다는 것을 선포하러 오셨다. 잠시 지나가는 연합의 순간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연합의 그림자일 뿐이다. 연합의 갈망을 불신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가로막는 진정 위험한 일이다. 연합의 갈망은 하나님이 주신 갈망이다. 그것이 없을 때 우리 삶은 생명력을 잃고 우리 마음은 냉담해진다. 진정 영적인 삶이란, 모든 갈망의 아버지요 어머니인 하나님의 품안에서 쉼을 찾기 전에는 쉬지 못하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