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천년설에 대하여, 조동호 목사 옮김(19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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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칼빈 신학대학원(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조직신학 교수를 역임한 안토니 A. 호에케마(Anthony A. Hoekema)가 [무천년설]의 입장에서 요한계시록 20장 1-6절에 관한 “해석법의 문제”를 다룬 글이다.[Anthony A. Hoekema, “Amillennialism,” The Meaning of the Millennium: Four Views(Downers Grove, Illinois: InterVarsity Press, 1977). Edited by Robert G. Clouse. pp. 155-187.]

천년왕국설에 관한 무천년설의 이해에 대한 본인의 진술에서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다루고자 한다. 요한 계시록의 해석법, 계시록 20장 1~6절의 해석, 지상 천년왕국을 예언하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보고 있는 구약성경에서의 두 구절, 무천년설의 종말론에 대한 간단한 설명, 무천년설의 종말론에 대한 몇 가지 암시들에 대해 요약 진술을 다루고자 한다.

용어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고자 한다. 무천년설이란 말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천년설 주창자들이 어떤 천년왕국설도 믿지 않는다거나 또는 천년왕국 통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계시록 20장의 첫 여섯 절의 말씀을 간단히 무시 해버리고 있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들 어느 진술도 사실이 아니다. 비록 무천년설 주창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오는 문자적 천년 지상통치를 받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무천년설이란 용어는 이 들 학자들의 견해를 정확하게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제이 E. 아담스(Jay E. Adams) 교수는 무천년설이란 말은 현실화된 천년설이란 표현으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설은 미래에 있을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재 실현되고 있는 일로 믿기 때문에, 현실화된 천년설은 확실히 무천년설의 주장을 무천년설 이란 말보다는 더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화된 천년설이란 표현은 세 음절로 된 단순 접두사로 대치한 시원찮은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인은 무천년설이란 말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더 짧고, 더 잘 알려진 말인 무천년설이란 말을 계속해서 사용코자 한다.

목차

  • 1 계시록의 해석
  • 2 계시록 20장 1~6절의 해석
  • 3 구약 예언의 해석
  • 4 무천년설 종말론에 관한 간단한 요약
  • 5 무천년설 종말론의 몇 가지 암시들

계시록의 해석

왕국설에 대한 무천년설의 견해가 가진 배경을 살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계시록의 해석문제에 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서, 계시록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와 그 주변 시기에 일어날 사건만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배타적으로 미래적인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가정하자. 계시록 20장에서 지시된 것이 계시록 19장에서 기술된 것을 필연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또 가정 해보자. 그러면 결과적으로 20장 4절에 묘사된 천년왕국 통치가 19장 11절에 기술된 그리스도의 재림 후 따라야 한다고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계시록 20장 1~6절이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시작되는 전 교회 역사를 통해서 일어날 사건의 기술로 본다면, 지금 막 언급한 것과는 전혀 다른 계시록 20장의 왕국설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계시록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석 방법에 관해 먼저 언급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내게 가장 만족스런 계시록의 해석 방법은 그것이 비록 단점을 가지고는 있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윌리암 헨드릭센(William Hendriksen)이 쓴 그의 계시록의 주석『정복자들 이상의 정복자』(More Than Conquerors)에서 기술된(Progressive parallelism)으로 알려진 해석법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계시록은 서로 평행을 이루고, 각각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시기까지의 교회와 세상을 묘사하는 일곱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들 중 첫 부분은 1~3장까지에 나타나 있다. 요한은 부활하시고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께서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걷고 계시는 것을 본다.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요한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각각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들과 함께 분명하게 한 부분을 형성한다. 이들 서신들을 읽으면, 두 가지 것을 느낄 수 있다. 첫째, 계시록이 기록될 때의 사건들과 사람들과 장소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둘째, 이들 서신들에 내포되어 있는 원리들과 칭찬들과 경고들은 모든 시대에 처한 교회들에 주시는 말씀으로써 그 가치를 가지고있다. 실제로 이를 두 가지 관찰은 전 계시록의 해석을 위한 단서를 제시한다. 계시록이 주후 일세기에 교회에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계시록의 메시지는 그 때 일어난 사건들을 지칭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당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계시록이 또한 전 시대에 걸친 교회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계시록의 메시지는 또한 오늘날 우리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들 일곱 부분 중 두 번째는 4~7장에 나타난 일곱 인에 대한 환상이다. 요한은 하늘로 들림을 받아 광채 나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게된다. 그리고는 베임 바 된 어린양이 보좌에 앉으신 이의 손에서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기를 받으시는 것을 본다. 여러 가지 봉인이 뜯기고, 여러 가지의 하나님의 심판이 기술되고 있다. 이 환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의 배경에 대항하여 가해진 고난과 박해를 당하는 교회를 본다.

셋째 부분은 8~11장에 나타나 있고, 일곱 나팔의 심판을 기술하고 있다. 이 환상에서 우리는 교회가 복수를 갚게 되고, 보호되고, 승리하는 것을 보게 된다.

넷째 부분은 12~14장에 나타나 있고, 여인이 한 아들을 낳은 환상으로 시작하며, 용은 이 아이가 출생하자마자 삼켜버리려고 대기하고 있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분명하게 언급하는 말씀이다. 이 부분의 나머지는 사단을 상징하는 용이 교회를 계속해서 박해하는 것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또 용의 협조자들인 두 짐승, 즉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다섯째 부분은 15~16장에 나타나 있고, 일곱 대접의 진노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회개치 않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징벌을 매우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여섯째 부분은 17~19장에 나타나 있고, 바벨론 큰 성과 두 짐승의 몰락을 기술하고 있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항하는 세속주의와 불경건의 힘을 가진 세속도시를 상징하고 있다. 19장 말에는 용의 두 협조자들의 몰락과 최후의 징벌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이들 짐승들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과 동일인으로 나타나는 거짓선지자이다(16:13을 보라).

일곱째 부분은 20~22장에 나타나 있고, 용의 운명을 설명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적들을 쳐부수는 것으로써 종결을 짓고 있다. 또 이 부분은 최후의 심판, 교회와 그리스도의 승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불리는 새로워진 우주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비록 이들 일곱 부분이 피차 평행을 이루고 있지만, 이들 역시 일정한 양의 종말론적 과정을 제시하고 있음을 주목하자. 예를 들어서 마지막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도 더욱 더 미래에로 우리들을 인도하고 있다. 최후의 심판이 이미 1장 7에서 선포되었고, 또 6장 12~17절에서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하더라도 20장 11~15절에서야 비로소 상세하게 그것이 설명되고 있다. 오는 세상에서 누릴 구속받은 성도들의 최후의 기쁨에 대해서 7장 15~17절에 암시되어 있지만, 21장에서야 비로소 상세하고 격조 높게 새 땅에서 누릴 축복된 삶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21:1~22:5). 그러므로 이 방법의 해석법을 점진적 평행이라고 부른다. 이들 일곱 부분에는 개개의 부분에서는 물론 계시록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한 팀이 되고, 그리스도의 적들과 사단의 교회가 한 팀이 된 둘 사이의 투쟁을 묘사하고 있다고 인정한다면, 계시록의 첫 전반은(1~11장)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당하고 있는 교회를 묘사하는 지상에서의 투쟁을 기술하고 있고, 계시록의 나머지 절반은(12~22장), 용(사단)과 그의 두 짐승에 대한 교회의 박해를 기술하면서, 이 투쟁의 영적 배경을 더 깊이 다루고 있다. 이 분석에 의해서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인 20~22장의 적절한 해석을 찾게 된다.

이 마지막 부분은 사단에게 임한 심판과 그의 최후의 운명을 기술하고 있다. 사단이 그리스도의 최고의 적수이므로 그의 운명이 최후에 기술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계시록 20장 1~6절의 해석

우리는 지금 천년설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성경구절인 계시록 20장 1~6절의 말씀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먼저 이들 구절들은 분명하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자. 1~3절의 말씀은 사단의 묶임을 기술하고 있고, 4~6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혼들의 천년 통치를 기술하고 있다. 이들 구절들의 말씀에 대한 전천년설의 해석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 일어날 지상에서의 천년왕국 통치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써 그것들을 보고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앞장인 19장 11~16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만약 계시록 20장이 19장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을 연대적으로 이어지게 기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계시록 20장 1~6절의 천년왕국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 도래할 것으로 정말 결론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바와 같이 20~22장은 계시록의 일곱 부분들 가운데 마지막 부분을 형성하고 있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이어지는 일들을 기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계시록 20장 1절은 초기 신약시대로 다시 한번 되돌아간다.

이것이 이들 구절들의 적당한 해석이라는 것은 위에서 발전된 것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본 장이 사단의 패배와 최후의 운명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분명히 사단의 패배는 그리스도의 초림 때부터 시작되었고, 12장 7~9절에서 이미 상세하게 설명되었다. 4~6절에서 기술된 천년왕국통치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일어난다는 것이 본 장 11~15절에 기술된 최후의 심판이 천년통치 후에 오는 것으로써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로써 증명된다. 계시록에서 뿐 아니라, 신약성경 다른 곳에서도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되어 있다(계시록 22:11과 마 16:27;25:31~32; 유 14~15 그리고 특별히 살후 1:7~10을 보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계시록 20장 4~6절의 천년통치는 그리스도의 재림 후가 아니라 전에 일어나야 한다.

자, 계시록 20장 1~6절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1~3절의 말씀부터 보도록 하자.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 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 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이들 구절에서 사단의 묶임에 대한 기술을 보게 된다. 분명히 마귀 또는 사단과 동일 인물인 용은 일 천년 동안 묶이고 무저갱이라고 하는 곳에 던짐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 결박의 목적은 천년이 차기까지 더 이상 만국을 속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계시록은 많은 상징적 수를 쓰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일천”이란 수는 분명히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열이란 수는 완전을 상징하기 때문에, 또 천은 십의 삼 제곱이기 때문에 “일 천년”이란 표현은 한 완전한 기간, 무한정한 길이의 매우 긴 기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계시록의 구성에 대해서 상기한 바와 함께 그리고 사단의 잠깐 동안 즉, 최후의 결투와 최후의 심판을 기술한 본 장의 7~15절에 비추어 동의함으로써 이 천년 기간은 그리스도의 초림 시부터 그의 재림 직전까지로 연장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10, 14, 15절에서 언급된 “불못”이 최후의 심판장소에 대한 기술이 분명하기 때문에, 1, 3절에서 언급된 무저갱은 최후의 심판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저갱이란 말은 사단의 활동이 일 천년 기간동안 제한될 것이라는 비유적인 기술로서 오히려 생각되어져야한다.

그러면 사단의 결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약시대에 적어도 아브라함 시대이후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사단의 통치아래 있었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은 자들이었고, 그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죄악과, 그들이 용서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세상의 다른 나라들은 그 진리를 알지 못하였고(행 17:30을 보라), 때때로 하나님의 특별계 시를 접한 개인, 가족, 도시를 제외하고는 무지와 과오 속에 살았다. 이 시기에 이들 국가들은 사단에 현혹되었다고 말할 수 있고, 우리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죄에 빠진 것도 사단의 유혹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대 위임을 주셨다(마 28:19). 이 때에 제자들은, 만약 사단이 과거에 했던 방법으로 만국을 현혹하기를 계속한다면 우리가 이것을 가히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혹의 질문이 일어났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계시록 20장 1~3에서 요한은 이 질문에 확실한 해답을 주고 있다. 그의 대답은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인 복음시대 동안에는 사단이 과거에 했던 방법으로 계속해서 만국을 현혹시킬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결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의 전 시기 동안에는 너희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 것이며, 만국을 제자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로 의역할 수 있다.

이것은 사단이 결박당하여 있는 동안 아무런 해도 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요한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을 오직 의미할 뿐이다. 사단이 결박당하여 있는 동안에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는 것을 훼방하는 방법으로 만국을 유혹할 수 없다. 본 장의 뒤에서 천년이 끝난 뒤에는 사단이 결박에서 풀릴 것이며, 나가서 세상의 나라들을 유혹하여 끌어 모아 하나님의 백성을 대항하여 싸우며, 가능하다만 하나님의 백성을 멸망시키려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7~9절). 그러나 이것을 사단은 결박당하여 있는 동안에는 할 수 없다. 그러면 복음시대의 사단의 결박은 첫째, 복음의 확산을 막을 수 없고, 둘째, 그리스도의 모든 적들을 모아 교회를 공격할 수 없다는 것으로 우리는 결론을 지을 수 있다.

신약성경에 사단이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결박당하였다는 어떤 암시가 있는가? 정말 있다. 바리새인들이 사단의 권능으로 마귀를 쫓는다고 예수를 비방하였을 때,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9)고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흥미 있는 것은 강한 자의 결박을 기술한 마태의 어휘가 계시록 20장에서 사단의 결박을 기술하기 위해서 사용된 단어와 같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이기시므로 승리의 개가를 올리셨고, 이때 사단을 결박하셨다. 예수의 마귀를 쫓으심은 이 승리에 대한 증거라는 것을 이 말씀에서 우리들에게 가르치신다. 여기서 언급된 사단의 결박은 복음의 전파와 연결하기보다는 마귀의 쫓으심과 연결하여 보도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마귀의 쫓으심은 하나님의 왕국의 임재에 대한 증거이며(마 12:28), 복음이 현재 만국에 전파될 수 있는 것은(마 13:24~30, 47~50을 보라) 분명히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칠십 인이 복음 전파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들은 예수님께 말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라고 하였다. 이때 예 수는 대답하시기를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보았노라”고 하셨다(눅 10:17~18). 이들 언어들은 말할 것도 없이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오히려 그의 제자들이 행하고 있는 사역에 의 해서 사단의 왕국이 치명적인 일격을 받았다는 징후 즉, 사단의 일정한 결박 또는 그의 권세의 일정한 제한이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해되어야 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 사단의 추락 또는 결박은 예수의 제자들의 선교활동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사단의 활동의 제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교사역과 연결되는 또 하나의 성경말씀은 요한복음 12장 31~32절이다. “이제 이 세상에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 끌겠노라 하시니”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쫓겨나리라”로 번역된 동사 “ekballo”로는 계시록 20장 3절에 “무저갱에 던져(ballo)” 라고 사용한 어휘와 같은 어원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심지어 더 중요한 것은 사단의 쫓겨남이나 던짐 당함이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리스도께로 인도될 것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는 관찰이다.

그러면 계시록 20장 1~3절에서 기술된 사단의 결박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전체 복음시대를 통한 사단의 영향력이, 비록 그것이 완전히 박멸된 것은 아니다 하더라도, 매우 큰 타격을 입어서 세계의 모든 국가들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방해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 시대의 사단의 결박으로 인하여, 국가들은 교회를 정복할 수 없고, 오히려 교회가 세상을 정 복하고 있다.

이제 일 천년 통치를 다루고 있는 말씀인 4~6절의 말씀으로 주제를 옮겨 볼까 한다. 계시록 20장 4~6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례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우리는 1~3절의 말씀이 천년시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이미 주목한바 있다. 4~6절의 말씀 또한 천년시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음을 지금 보게 된다. 4~6절의 천년기간이 1~3절의 천년기간과 다른 시기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써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왜 그렇게 믿어야 되는지 확실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1~3절과 4~6절의 말씀이 같은 시기의 천년을 말하고 있다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본대로 그 기간은 전체 신약시대 즉,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까지의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믿는다.

4절 말씀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고 4절은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직면해야 할 첫째 질문은 이들 보좌들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계시록에 “보좌”라는 말이 47번 사용되고 있는데, 세 번(2:13; 13:2; 16:10)을 제외한 이들 모든 보좌들은 하늘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요한이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을 본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 고려 점에 부과한다면, 우리는 요한의 환상의 장소는 이제 천국으로 바뀌었다는 결론을 확고히 내릴 수 있다. 그러면 이들 여섯 절에 기술된 일 천년시기는 내내 같은 반면에 1~3절은 이 천년시기에 지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기술하고 있고, 4~6절은 천국에서 일어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은 심판하는 권세를 받은 자들이 앉은 것을 본다. 계시록은 정의문제에 특히 박해 당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정의문제에 훨씬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의 환상에서 보좌들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심판할 권세가 주어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보좌 위에 앉은 것으로써 그들에 대한 요한의 기술은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한다는 생각을 표현하는 하나의 견고한 방법이다(4절 후반 절을 보라). 분명히 이 통치는 재판할 수 있는 권세를 포함한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재판에 대해 단순히 동의하고 감사한다는 뜻인지 또는 보좌에 앉은 자들에게 세상일에 대한 그들 스스로의 재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의미인지는 확실치 않다. 어떤 경우에서든 여기 기술된 그리스도와의 다스림은 그리스도의 재판 활동에 부분적으로 동참하고 있음을 포함한다(단 7:22을 보라).

다음 문제는 누가 이들 보좌 위에 앉는가 이다. 해답은 나머지 절인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에서 주어지고 있다. 요한은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을” 보았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지상에 현재 살고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확실히 “혼들”(psuchai)이란 말은 때때로, 사도행전 2장 41절의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며,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 이나(three thousand souls) 더하더라”는 말씀과 같이 지상에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을 기술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계시록 20장 4절에서의 psuchai(혼들)란 말에는 이러한 의미가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Tas psuchai ton pepelekismenon을 “목 베임 당한 사람들” 또는 “목 베임을 당한 백성들”이라고 해석 할 수 없다.[여기서 저자는 목 베임을 받은 사람들은 죽은 자들이므로 psuchai를 “혼들”이라고 번역해야지, 그것을 마치 산 사람처럼 “목 베임 받은 사람들 또는 백성들”로 해석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psuchai이란 말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지칭하는 말이어야 한다. 실제로 이 본문은 계시록 6장 9절의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 가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아래 있어”의 말씀과 일종의 평형을 이룬다.

요한이 죽은 자들의 영혼을 어떻게 볼 수 있었는가를 묻는다면, 해답은 요한이 환상 속에서 이 모든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또 어떻게 요한이 천사가 마귀를 잡아 일 천년동안 결박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가? 라고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은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을 본다. 환언하면 순교자들의 영혼들 즉 그리스도께 바친 충성심 때문에 순교의 죽음을 당한 신앙인들의 영혼들을 요한은 본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하였을 때,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믿음 때문에 순교를 당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에 기록된 환상은 이들 순교자들의 친척들이나 친구들에게 많은 위안을 줄 것이다. 요한은 그들의 영혼이 지금 천국에 있는 보좌들에 앉아서 심판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보고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 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다.” 신국제개역(New International Version)성경은 마치 그들이 앞에서 말한 절에서 언급한 순교자들에 대해서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이들 말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표준개역(American Standard Version) 성경에서 발견되는 번역에 의해 전달된 가능성인 또 하나의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 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않은 것과 같은” 이라고 이 성경은 쓰고 있다. 이 미 계시록에서는 믿지 않는 그리스도의 반대자들과 그의 왕국은 짐승과 그의 우상을 숭배하고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로써 기술되고 있다(13:8, 15~17; 14:9~11을 보라). 그 반대로 주님께 믿음을 지킨 신자들은 짐승과 싸워 승리한 자들로써(15:3) 또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 경배하지 아니한 자들로써(13:15)기술되고 있다. 그러므로 본인은 요한이 단지 순교자들보다는 더 폭넓은 그룹을 본 절에서 기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끝까지 고수하고 반기독교적인 권세에 대항한 모든 기독교인을 의미한다. 순교의 죽음을 당한 자들은 이 그룹의 일부이긴 하나, 그들이 이 그룹의 천체는 아니다(비록 요한이 여기서 “영혼들”에 대해서 특별히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베임 바 당한 순교자들의 영혼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였기 때문에 죽은 신자들의 영혼에 대해서 아직까지 말하고 있다고 별 무리 없이 추측할 수 있다).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구절은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 하니”하신 말씀이다. 전천년설 해석자들은 시대구분론이나 비시대구분론이거나를 막론하고 이 구절이 죽음으로부터의 문자적 부활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이 구절에서 지상에서의 재림 후 그리스도의 천년통치에 대한 입증을 찾는다. 이것이 이 구절의 정확한 해석인가?

“살아서”로 번역된 헬라어 ezesan은 육체적 부활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마 9:18; 롬 14:9; 고후 13:4; 계 2:8을 보라). 그러나 이것이 그 단어가 여기서 의미하는 것인지가 문제이다. 요한이 여기서 부활의 종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은 5절 하반 절의 “이는 첫째부활이라”하신 말씀 즉, 4절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서 통치하는 것을 분명히 말하는 말씀으로 보아서 분명하다. 그러나 이 첫째부활이 육체의 부활 즉 죽음에서 일어나는 몸의 부활을 말하는 것인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죽음에서 얼어나는 몸의 부활은 여기서 기술된 것과는 구별이 되는 무엇으로써 20장 11~13절에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개의 몸의 부활 즉, 천년왕국 초기의 신자들의 부활과 천년왕국 후에 있을 불신자들의 부활을 믿을 때에만 비로소 4절의 ezesan이 몸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신자와 불신자 모두를 포함하는 한 가지의 몸의 부활만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요 5:28; 행 24:15을 보라), 4절 하반 절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있을 육체나 몸의 부활이 아닌 다른 무엇이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 하니”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4절 전 반절에 실마리가 이미 주어져 있다. 거기 서 요한은 말하기를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앞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고 하였다. 하반 절은 보좌에 앉은 자들은 죽은 백성들의 영혼들 즉, 믿음 때문에 순교 당한 자들과 생명이 다하기까지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 바친 성도들이었다고 간단하게 설명한다. 이것이 “살아서 천년동안 왕노릇”한 그룹이다. 비록 이들 성도들이 죽었지만, 몸으로서가 아니라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를 나누며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의미에서 요한은 살아있는 것으로써 그들을 본다. 이 삶이 지고한 행복의 삶이다(빌 1:23과 고후 5:8에서 쓴 바울의 말씀을 보라). 그것은 그들이 보좌에 앉아 만물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함께 참여하며, 심어지는 심판하시는 일에까지 함께 참여하는 삶이다. 이 하늘의 통치가 계시록에서 이 미 언급한 약속인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3:21) 하신 말씀의 성취이다.

요한의 시대에 교회가 빈번한 압박과 핍박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때, 우리는 이 환상의 중요성을 인식 할 수 있다. 비록 많은 동료 기독교인들이 죽었고, 일부는 심지어 순교를 당하기까지 극악한 처형을 받았다 할지라도, 이들 죽은 동료 신자들이 그들의 영혼에 관한 한 현재 실제로 천국에 살아 있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서 통치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그들 성도들에게는 대단한 위로가 됐으리라. 요한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서 다스리는 것은 천년동안 즉, 전체 복음시대에 걸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무덤에서 이들 성도들의 몸을 살리시기까지 계 속 될 것이라고 한다.

요한이 지상 천년왕국 통치를 기술하고 있다는 어떤 암시도 이들 구절들에 나타나 있지 않다. 우리가 본 장면은 천국에 고정되어 있다. 아무것도 4~6절에서 지상에 관하여, 특히 이 통치의 중심지인 팔레스타인이나 유대인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계시록 20장 4절의 일 천년 통치는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서 다스리는 통치를 말한다. 이 통치는 미래에 나타날 어떤 것이 아니며,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천년왕국의 문제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상에 있는 것이라는 것이 기억된다면, 현실화된 천년왕국설이란 말은 여기 변증된 견해에 대한 적절한 기술이 될 것이다. 다음 문장인 5절 상반 절은 괄호 속에 들어가야 할 성질의 것이며, 그러므로 신국제개역에서는 그것이 괄호 속에 다음과 같이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라고 적절히 놓여 있다. 이들 말이 천년왕국 이후에 일어날 몸의 부활을 기술하고 있다는 것을 왜 본인이 믿지 않는지 그 이유를 이미 언급한 바 있다. ezesan이란 말은 본문에서 사용된 대로 전문에서 그것이 의미했던 꼭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한은 여기서 불신자들의 죽음 즉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의 죽음에 대해서 요한이 방금 기술한 신자들의 죽음과 구별하여 말하고 있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이 살지 못하더라고 요한이 말할 때는 그가 방금 신자들에 대하여 말한 것과는 반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즉 불신자들은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이 일 천년 기간 동안 통치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사후에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서 새로운 삶을 즐기며, 그리스도의 통치에 함께 동참하는 한편, 사후에 불신자들은 이 생명이나 통치 어느 것도 함께 나누지 못한다.

일 천년 기간 전반에 걸쳐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라는 말에 의해서 지적되고 있다. 여기서 “까지”로 번역된 헬라어 achri는 여기서 말한 것이 천년 기간의 전체 기간 동안 사실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까지”라는 말의 사용은 이들 죽은 불신자들이 살아서 이 기간이 끝난 후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효과에 대한 분명한 진술을 우리가 기대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진술의 예문은 계시록 20장 3절에 나타나 있다). 오히려 일 천년이 끝난 후 죽은 불신자들에게 일어날 일은 6절에서 말하는 “둘째 사망”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둘째 사망”이 죽은 신자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는 것을 6절에서 말하는 것은 “둘째 사망”이 죽은 불신자들 위에 권세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사망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14절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 둘째 사망은 몸의 부활 후에 받는 영원한 형벌을 의미한다. 죽은 불신자들에 관한 한, 일 천년이 끝난 후에 변화가 있을 것이며, 더 좋아지기 위한 변화가 아니라 더 나쁘게 되는 변화가 될 것이다.

요한은 “이는 첫째 부활이라”고 계속해서 말한다. 이 구절은 방금 설명한 괄호 속의 진술 직전에 나오는 4절 하반 절에 요한이 기술하고 있는 죽은 신자들에게 일어난 일을 묘사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것에 비추어서 우리는 이들 말들이 몸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의 죽음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서 누리는 삶의 전환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전환이 여기서 부활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잘 쓰는 말은 아니지만, 앞서의 문맥의 배경에 비추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첫째 부활”이란 표현은 이들 죽은 성도들을 위한 “둘째 부활” 즉 일 천년기간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일어날 몸의 부활이 정말 있을 것을 의미한다. 요한은 6절에서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라고 말한다. 다음 구절에서 축복된 이유를,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는 데 두고 있다. 우리가 본대로 둘째 사망은 영원한 형벌을 의미한다. 둘째 죽음에 대한 이들 말들은 요한이 막 언급한 “첫째 부활”이 몸의 부활이 아님을 뜻한다. 왜냐하면, 만약 신자들이 영화롭게 된 몸들 즉, 육체적으로 일으킴을 받은 것으로써 여기서 생각되어야 한다면, 그들은 이미 도래할 생명의 충만한 축복을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 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이 전체 천년 기간동안, 죽은 신자들은 제사장으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스릴 것이다. 요한이 여기서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연장될 기간을 단지 일 천년 가량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계시록의 마지막 몇 장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 몸의 부활 후에 이들 죽은 성도들이 그들이 현재하고 있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며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수 있을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은 새 땅에서 영화롭게 된 몸으로 죄 없는 완벽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시록 20장 1~6절의 무천년설의 해석이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대로 이들 본문은 우선적으로 유대인의 왕국으로 세워질 그리스도의지상 통치에 대해서 아무것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이 천국에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다스리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죽은 날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다스린다.

구약 예언의 해석

전천년설 주창자들과 무천년설 주창자들 사이에 채택된 성경해석방법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전천년설 주창자들 특히 시대구분론적 전천년설 주창자들은 소위 구약 예언의 “문자적” 해석이라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시대구분론적 전천년설의 대표적인 인물인 존 F. 발부르드(John F. Walvoord)는 이 해석학파의 해석학적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전천년설의 입장은 문맥이나 신학적 이유들이 이것이 저자가 의도한 것 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지 않는 한 성경은 신학의 모든 분야에서 평범한 문자적 및 역사적 의미 속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에 관한 그의 논술에서 발부르드는 때때로 구약성경의 말씀은 부분적이나마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아니하고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할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고 인정하고, 그리스도께서 이사야서 11장 4절에서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하신 말씀을 그 예로 들었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그와 반대로 많은 구약성경의 예언이 정말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져야 하지만, 대부분의 구약 예언들은 비문자적인 방법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추상적으로는 무천년설 주창자들이 발부르드의 전천년설의 해석법에 대한 정의에 동의를 할지 모른다. 무천년설과 전천년설 해석자들의 차이는 각각의 해석자들이 어느 예언들은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하고, 어느 예언들은 비문자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가를 지적하려고 할 때 생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견해의 차이가 심하다.

지면관계 상 해석상의 격차를 깊이 있게 다룰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전천년설 주창자들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장래의 지상 천년왕국 통치를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두개의 구약성경 구절을 간단히 살펴보는 것 이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이들 두개의 대표적인 구절들에 대한 전천년설의 해석이 어떠한 의미에서도 단 하나의 유일한 해석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신스코필드성경(New Scofield Bible)에 의해서 제시된 이사야서 11장 6~9절을 먼저 살펴보자.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 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상기한 이사야서 11장 1~10절까지를 1967년판 신스코필드성경(New Scofield Bible)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회복될 다윗 왕국: 그 성격과 범위”라는 제목으로 적고 있다. 1절에 대한 주석으로 다음과 같이 “11장은 다윗의 아들이 영광 가운데에 재림하실 때 세워지게될 미래의 왕국이 누릴 영화에 대한 예언적 묘사이다” 라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신스코필드성경은 이 성구가 장래의 천년왕국시대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시대구분론적 전천년설의 대표적인 주석가인 발부르드는 11장에 대한 해석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사야 11장은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생생한 묘사이며 현 시대와 혼동될 수 없는 장면이며, 중간상태이며 또는 이것을 평범한 문자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영원한 상태를 말한다. 제시한대로, 이것은 지상 천년왕국을 기술하고 있다. (11장에서 발견된) 기술은 이리, 어린양, 표범, 어린 새끼들, 소, 어린 사자들, 그리고 천국의 것이 아닌 지상에 사는 모든 피조물과 같은 짐승을 기술하고 있고, 이들 짐승들은 지상 천년왕국에만 적용될 수 있는 평정의 시기에 사는 것으로 계속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만약 독자가 미래의 천년왕국을 믿는다면, 이들 성구에서 기술된 그 천년왕국을 볼 것이라는 것이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어떤 의미에서도 단 하나의 유일한 해석방법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 말에 새 땅이 나타날 것을 성경이 예언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예를 들면 이사야 65:17; 66:22; 계 21:1을 보라). 왜 그러면 우리는 새 땅에서의 삶에 대한 기술로서 이들 구절에서 말하는 세부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이것 이 특별히 9절에 실린,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는 완전한 파노라마 식의 환상의 관점에서 더욱 그렇다. 왜 이들 말씀이 새 땅이 나타나기 이전 일 천년 시기에만 적용하는 것으로써 생각되어져야만 하는가? 이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의 최종적인 완전성을 묘사하지는 않는가? 이것과 관련해서 본인이 제시하고픈 다른 구약성경의 말씀은 이사야서 65장 17~25절이며, 역시 신스코필드성경에서 인용한다.

[17]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19]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20]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 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것이리라. [21]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22]그들의 건축한 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23]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24]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25]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상기의 17절의 말씀을 신스코필드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이란 제목으로 적고있다. 이 성경의 편집자들은 17절의 말씀은 마지막 새 땅에 대해서 기술하는 것으로 마지못해 받아드리면서, 18-25절의 말씀은 제한시키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발부르드는 이와 비슷하게 이사야서 65장 17-19절은 영원한 상태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써 그리고 20-25절은 지상 천년왕국의 상태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써 이해하고 있다. 만약 독자가 장래의 지상 천년왕국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확실히 설득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더 주목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독자가 그와 같은 지상 천년왕국을 믿는다면, 그는 여기서 이들 성구들이 그것에 관해서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믿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가 오히려 심각한 주석학적 장애를 극복해야할 것이다.

독자는 이들 성구들에서 지상 천년왕국에 관한 기술을 발견할 수 있겠지 만, 17~18절에서 발견되는 것들을 의도적으로 간과함으로만 가능하다. 17절 은 분명하게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최종적인 상태라고 묘사하고 있다). 18절은 17절에서 언급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단지 일 천년 동안만이 아니라, 영원토록 기쁨을 누리라고 외치고 있다. 이사야는 여기서 천 년밖에 지속이 안 되는 새로운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아니 하고, 오히려 영원토록 지속되는 새로운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19절에서 따르는 말씀도 앞에서 언급한 말들에 직접적으로 연결을 짓 고 있다.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 할 것이며” 라고 말하고 있다(계 21:4을 보라). 19절에서나 18절 또는 20절에서 이사야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에 앞서 나타나는 천년왕국 시대에 대하여 갑자기 기술을 바꾸고 있다는 어떠한 암시도 없다.

실제로 25절에는 이사야서 11장에서 기록된 최종적인 상태에 대한 묘사에 대해서 생각나게 하는 동물세계에 대한 기술이 있다. 25절 하반 절은 11장 9절의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에 대한 반복된 언급에 지나지 않는다. 새 땅에 대한 정 말 아름다운 하나의 기술이다. 독자는 단지 그가 먼저 지상 천년왕국이란 색안경을 쓰고서야 비로소 여기서 지상 천년왕국을 보게될 것이다.

무천년설 종말론에 관한 간단한 요약

무천년설 종말론에 대한 보편적인 비판은 합의되지 않은 종말론적 체계를 반박하고 반대하는데 최우선적으로 힘을 소진하고 있고, 너무 부정적이라는데 있다. 이 비판이 옳고 그른 것의 문제를 떠나서 무천년설 신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적극적 긍정을 간단히 스케치함으로써 일부 무천년설 의 종말론에 대한 부정적 요소를 이 시점에서 제거하고자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설에 대한 일정한 해석으로서만이 아니라 무천년설의 종말론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스케치는 첫째, 무천년설 종말론이 출범한 종말론(inaugurated eschatology)에 관하여 가르치는 것이 무엇이며, 둘째, 무천년설 종말론이 미래의 종말론(future eschatology)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두 가지 점에서 다룰 것이다. 출범한 종말론이란 말은 현실화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란 말보다 더 낫다. 왜냐하면 출범한 종말론이란 말이 위대한 종말론적 새김이 역사 속에 이미 새겨졌다는 사실을 아주 잘 반영하는 한편, 미래에 있을 계속적인 종말론의 전개와 최종 완성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출범한 종말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약성경을 신뢰하는 신자는 중요한 종말론적 사건들이 이미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다른 종말론적 사건들도 여전히 미래에 나타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출범한 종말론을 논하면서 무천년설은 다음과 같은 내 용을 주장한다.

1)그리스도는 죄, 사망, 사단을 누르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셨다.

무죄 한 삶을 사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서 구속의 희생으로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으로 그리스도는 죄를 패배 시키셨다. 죽음을 맛보시고 무덤에서 승리롭게 일어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사망을 패배시키셨다. 사단의 유혹을 이기시고 하나님께 완전하게 순종하셨고,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단과 그의 사악한 군대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셨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결정적이며 최종적이었다. 그러므로 역사상에 가장 중요한 날은 아직 미래의 일인 그리스도의 재림이 아니라, 과거에 이미 일어난 그리스도의 초림이다. 그리스도의 승리 때문에 역사상의 궁극적인 이슈들은 이미 결정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승리가 최종적인 완성에 이르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2)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와 미래 모두 다이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이 다윗의 왕좌의 문자적 회복을 믿는 우선적으로 유대인 왕국이 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의 불신앙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미래의 지상 천년왕국의 건립을 연기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이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워졌고, 현재 역사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도래할 세상에서 완전히 그 모습을 나타나기로 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 역사 속에서 다이내믹하게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라고 이해한다. 그것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며,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만드신 전체 우주를 통치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의 실재이며, 미래의 소망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더라도 예 수는 왕국이 이미 임재하였음을 분명히 가르쳤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할 것인지를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고 대답 하셨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왕국이 여전히 미래에 도래할 왕국의 의미도 있다는 것을 특별히 하신 말씀(마 7:21~23; 8:11~12)과, 종말론적 비유(혼인잔치, 가라지, 달란트, 열 처녀 비유와 같은 비유)에서 가르치고 있다. 바울도 역시 왕국을 현재(롬 14:17; 고전 4:19~20; 골 1:13~14)와 미래(고전 6:9; 갈 5:21; 엡 5:5; 딤후 4:18)에 모두 존재하는 것으로써 기술하면서 진술하고 있다. 하나님의 왕국이 어떤 의미에서는 현존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에 올 것이라는 사실은 그 왕국의 신하들인 우리들은 “이미”와 “아직”이란 일종의 긴장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 미 그 왕국에 살고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왕국의 완전한 나타남을 고대하고 있다. 우리가 이미 그 왕국의 축복들을 누리고 있으며, 또한 그 왕국의 완전한 승리를 기다린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정확한 시기를 모르기 때문에 교회는 역사의 종말이 멀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긴박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교회는 계속해서 계획을 세우고, 아직도 오랜 시간 계속될지도 모를 이 현 지구에서 미래를 위해 계속해 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하나님의 왕국은 그리스도와 그의 대의를 위해서 완전한 헌신을 바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개인들뿐만 아니라 전 우주의 구속의 목표에 비 추워서 삶의 모든 것과 현실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명성 있는 네덜란드 신학자이자 정치가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한 때 언급한 것처럼, 이 우주상 어느 한 조각도 그리스도께서 “그것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완전한 헌신은 역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수행하는 것으로써 보아져야 한다는 기독교인의 역사철학을 또한 의미한다. 이 왕국 환상은 예술과 과학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반영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찬양을 위해 추구되어야 할 것이라는 기독교인의 문화철학을 포함한다. 그 왕국의 환상은 또한 모든 소명들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이것이 공부이든, 가르치는 것이든, 목회 하는 것이든, 사업, 공업 또는 가사 일이든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찬양을 위 해 행하여져야한다는 기독교인의 직업관을 또한 포함한다.

오늘날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일고 있는 긴장의 보편적 근원은 교회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할 것이 복음이냐 또는 사회정치활동이냐의 문제이다. 본인 생각으로는 알맞은 왕국 환상은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균형을 유지시켜 주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불려 들이는 복음은 교회의 본질적인 임무중 하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은 완전한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에, 교회는 정치사회를 포함한 모든 삶의 분야에서 기독교의 원리들이 실천될 수 있도록 최선의 관심을 쏟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복음과 사회 관심은 기독교인이 선택해야할 옵션으로서 생각해서는 결코 아니 되며, 모두다 완벽한 왕국 순응에 필수적이다.

3)마지막 날이 아직 미래에 있을 사건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지금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

복음주의자들 가운데에서도 자주 경시되고 있는 종말론의 이 측면은 신약성경 메시지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우리가 지금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 고 본인이 말하는 것은 “마지막 때”가 그리스도의 재림직전 어느 특정 시기를 말하는 것은 물론,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의 전체시대를 기술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기록자들은 그들이 말하고 기록할 당시에 그들이 이미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강림 후 마지막 때에 모든 육체에게 물 붓듯 부으시는 성령의 강림에 대하여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한 그의 설교에서 이 사실이 특별히 언급되고 있다(행 2:16~17). 그러므로 베드로는 “우리가 지금 선지자 요엘이 예언한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말하고 있다. 바울도 “또한 말세를 만난 무리”(고전 10:11)라고 당대의 신자들을 기술함으로써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사도 요한 역시 당대의 독자들에게 그들이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요일 2:18). 이들 신약성경의 가르침 에 비추어서, 요한이 흔히 쓰는 “말세”(요 6:39~40,44,54; 11:24; 12:48)라는 종말론적 사건들의 최종적 완성에 대해서 성경이 역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한편, 우리는 또한 출범한 종말론에 대해서 진정 말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이미 종말론적 축복들의 시작들을 맛보고 있다는 것과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롬 8:23). 신자인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시험에 직면해서 어쩔 줄 모르는 허약한 죄인으로 보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고후 5:17), 성령의 성전들로서(고전 6:19), 그리고 육체를 결정적으로 십자가에 못박고(갈 5:24) 옛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자들로서 본다(골 3:9~10)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이 부정적인 측면보다는 우선적으로 긍정적인 측면에서 우리 자신의 이미지를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또한 동료 기독교인들을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로서 그리고 우리가 그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해야할 것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4)계시록 20장의 일 천년에 관한 한, 우리는 현재 천년왕국 안에 있다.

계시록 20장 초반부에서 계시록 20장의 일 천년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사단이 잠깐동안 결박에서 풀릴 때인 그리스도의 재림직전까지 연장된다는 입장을 위해 증거가 제시되었다. 계시록 20장의 천년에 대한 무천년설의 입장은 사단이 이 기간 동안 결박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 살아 있는 기독교인들은 이 천년 왕국의 혜택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언급한 대로 사단이 현재 결박되어 있다는 사실은 사단이 오늘날 이 세상에서 활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단은 이 시기 동안 만국을 현혹할 수 없다. 즉 복음의 전파를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기 동안의 사단의 결박은, 환언하면, 선교와 복음전파를 가능케 한다. 이 사실은 확실히 지상의 교회에 위안의 근거가 될 것이다.

무천년설은 또한 이 천년 기간 동안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이 몸의 부활을 기다리는 동안 현재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서 왕노릇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그들의 상태는 비록 그들의 기쁨이 그들의 몸이 부활할 때까지는 완전하지 않다 할지라도 축복과 행복의 상태이다. 이 가르침은 그들의 사랑하는 자들이 주의 품안에 있는 자들에게 확실히 위안을 가져올 것이다.

미래의 종말론에 관해서 무천년설은 다음의 것들을 인정한다.

1)”말세의 징조”는 현재와 미래의 관련성을 모두 갖는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말세의 어떤 징조들이 나타날 것을 믿는다. 예를 들면, 모든 나라들에 복음이 전파되고, 이스라엘 전체의 회심, 대배교, 대환란 및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들 징조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바로 직전시기에 나타날 배타적인 것들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초창기시대부터 있었으며, 현재에도 존재한다. 이것은 재림을 항상 준비해야 한다는 것과 우리 생각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먼 미래에 있을 사건으로 밀어 내버려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이들 “말세의 징조”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바로 직전에 절정을 이룬 최후의 성취를 갖게 될 것을 믿는다. 이 성취가 전적으로 새로운 현상의 형태를 취하기보다는 오히려 오랫동안 현존해왔던 징조들이 강하게 증대 될 것이다.

2)그리스도의 재림은 단 한번의 사건일 것이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시대구분론적 전천년설 주창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칠 년의 기간사이에 두는 두 가지 측면(때때로 휴거와 출현 또는 계시로 불린다)으로 나누는 주장에 대해 성경적 근거를 찾지 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단 한번의 사건으로 이해한다.

3)그리스도의 재림 당시에 신자와 불신자 모두의 단 한번의 일반적인 부활의 사건이 있을 것이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신자의 부활과 불신자위 부활을 천년기간으로 분리하는 보편적인 전천년설 교리를 반대한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또 셋 또는 네 번의 부활이 있을 것으로 주장하는 시대구분론자들의 견해에 반대한다(앞서 언급한 두 번의 부활이외에도 시대구분론자들은 대환란 성도들의 부활과 천년왕국 기간 동안에 죽은 신자들의 부활이 있을 것도 가르친다). 우리는 이와 같은 다수의 부활에 대해 성경적 근거를 찾지 못한다.

4)부활 후, 아직 살아있는 신자들은 그 때 갑자기 변형되어 영화롭게 될 것이다.

이 교리에 대한 근거는 바울이 말한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의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 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하신 말씀이다.

5)모든 신자들의 휴거가 이제 일어난다.

막 변형을 입은 살아있는 신자들과 함께 죽음에서 막 부활한 신자들은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구름 속으로 올리어 간다(살전 4:17). 그와 같은 “휴거”가 있을 것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다. 그러나 본인은 휴거라는 말을 따온 표 사이에 넣어서 시대구분론자들의 견해로부터 무천년설의 휴거의 개념의 차이를 구별코자 하였다. 시대구분론자들은 휴거 후 전체 교회가 천국으로 들림 받아 칠 년 기간 동안을 지낼 것이며, 이때 지상에 남은 자들은 대환란을 겪을 것이라고 말한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이와 같은 칠 년 기간이나 또는 이 시기에 교회가 지상에서 천국으로 옮길 것에 대한 성경적 증거를 보지 못한다. 신자들의 부활하여 영화롭게 된 몸들은 하늘에 속하지 아니 하고 지상에 속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서 “영접”이란 말로 번역된 말은(apantesis) 신약시 대 당시에 귀한 방문객에게 시(市)가 베푼 공개환영을 기술하는데 사용한 기술적인 용어이다. 사람들은 보통 귀한 방문객을 맞이하기 위하여 시를 떠나서 그분을 시 밖에서 맞아하여 도시로 돌아온다. 이 말이 가진 유사성에 근거해서 바울이 여기서 말한 모든 것은 부활하여 변형된 신자들이 구름 속으로 들림을 받아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주님을 맞이한다는 것이며, 이 마중 후에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지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함유하고 있다.

6)이제 최후의 심판이 뒤따른다.

시대구분론자들은 적어도 세 번의 분리된 심판이 있을 것으로 보통 가르치고 있지만,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 일어날 단 한번뿐인 최후의 심판이 성경적 증거를 갖고 있다고 본다. 모든 사람은 그때 그리스도의 재판석 앞에 나타나야 한다.

최후의 심판의 목적은 인간의 최종적인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우선적인 것 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아직 살아있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최종적인 모든 인간의 운명은 이미 그때까지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 다. 오히려 심판은 세 가지의 목적을 갖게 될 것이다. 첫째, 그것은 각 사람에게 할당된 최종적인 운명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둘째,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적군들 사이에 역사적인 큰 대조를 최종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지적할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그것은 각 개 인이 받을 상급의 정도와 징벌의 정도를 나타낼 것이다.

7)심판 후에 최종적인 상태가 시작될 것이다.

불신자들과 그리스도를 거역한 모든 자들은 지옥에서 영원토록 살 것이며, 한편 신자들은 새 땅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며 살 것이다. 새 땅의 개념은 성경적 종말론에 대단히 중요한 것이어서 우리는 스쳐 가는 생각 이 상으로 그것을 연구해야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들 자신들이 어떤 천상에서 영원토록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새 땅이 있을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있다. 계시록이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새 땅으로 내려올 것과(21:2), 하나님께서는 이제 사람들과 함께 당신의 거처를 가지질 것과(21:3),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새 예루살렘에 있을 것을 우리들에게 말할 때(22:3), 오는 세계는 하늘과 땅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합류할 것을 비유적인 언어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상태에서 영화롭게 된 신자들은, 하늘과 새 땅이 그때는 하나가될 것이기 때문에 하늘과 새 땅 모두에서 살게 될 것이다. 독자가 마음에 분명히 새 땅의 환상을 가질 때, 많은 성경적 가르침들이 하나의 중요한 패턴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본 대로, 몸의 부활은 새 땅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우주적인 중요성은 인간의 죄 때문에 피조물에 닥친 저주는 언젠가 제거될 것을 포함한다(창 3:17~19; 롬 8:19~22). 이 피조물의 새로워짐은 정말 새 땅일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또 새 땅에 관한 특별한 약속을 포함한다. 우리는 이미 65장 17절(66:22을 보라)에서 새 땅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을 보았다. 예수는 온유한 자가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마 5:5). 베드로는 의로움이 거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말한다(벧후 3:13). 계시록 5장에 기록된 하늘의 환상에서 요한이 본 장로들과 살아있는 생물들이 승리의 어린양에게 다음과 같은 찬양의 노래를 부른다. “. . . .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 하더라”(계 5:9~10).

새 땅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에 비추어서 가나안 땅과 하나님 백성의 미래에 대한 많은 구약성경의 예언들은 여기에 맞아떨어진다. 히브리서 4장으로부터 가나안은 도래할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안식처의 모형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배운다. 갈라디아에 보낸 바울의 서신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자들은 아브라함의 씨앗 안에 포함된다(갈 3:29). 우리가 이들 개념들에 대한 폭넓은 신약성경의 이해를 가지고 창세기 17장 8절의 말씀을 읽을 때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의 영원한 소유로서 새 땅에 대한 약속을 그 말씀 속에서 보게 된다. 그리고 이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아모스 9장 15절의 말씀을 읽을 때 (내가 저희를 그 본토에 심으리니, 저희가 나의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 하리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우리는 이들 말씀의 의미가 이스라엘 국가와 팔레스타인 영토에 제한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가 가나안이 하나의 모형인 새 땅에서 살게될 영원한 거주지에 대한 예언으로써 이해된다. 그러므로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이런 종류의 예언들의 성취를 준비하기 위하여 지상 천년왕국을 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그와 같은 예언들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기다리는 영화로운 영원한 미래를 지적하는 것으로써 본다.

전천년설 주창자들은 무천년설 주창자들이 미래의 왕국을 단순히 영적이고, 지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가르친다고 비판하는데, 무천년설의 견해를 올바로 알고 하는 소리로 볼 수 없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약속의 땅이 하나님의 백성의 영원한 소유가 될 것과, 이리가 어린양과 살 것과,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 지상에 충만할 것을 예언하는 구약성경의 예언은 단지 일 천년 기간동안만이 아니라, 영원토록 성취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믿기로는 이 해석이 그들의 의미를 최종적인 상태 전에 나타날 지상 천년왕국의 기술로 제한하는 것보다는 그들 예언들에 대한 더 부유하고, 더 넓고, 더 많은 관련성 있는 이해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무천년설 종말론의 몇 가지 암시들

결론으로 신학적 이해에 대한 무천년설 종말론의 몇 가지 암시들은 무엇들인가? 네 가지 것으로 설명 해보고자 한다.

1)신구약성경을 함께 묶는 것은 은혜의 계약의 통일성이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성스런 역사가 일련의 특출하고 공통성 없는 시대로 구분된다고 믿지 않으며, 전체 역사에 흐르는 단 하나의 은혜의 계약으로 본다. 이 은혜의 계약은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며, 새 땅에서 하나님과 그의 구속된 백성이 함께 하는 영원한 거처에서 정점을 이룰 것이다.

2)하나님의 왕국은 인간 역사의 중심이다.

왕국이 구약시대에 예언되고 마련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지상에 세워졌으며, 신약시대와 뒤따르는 교회시대 모두에로 확장되고 팽창되었으며, 결국 도래할 세상에서 완성될 것이다.

3)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주이시다.

이것은 모든 역사는 그리스도의 조종아래 있으며, 그의 목적에 보조적이었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입증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축복들을 누리는데 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분야에서 그리스도를 주로서 기쁘게 섬기는데 또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4)모든 역사는 우주의 완전 구속인 한 목표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

역사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각 개의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항상 구별할 수 없다할지라도, 우리는 역사의 궁극적인 결과가 무엇일 것인가를 안다. 우리는 새로워진 우주의 일부분으로써 새 땅을 학수고대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은 결국 그리고 완전히 하나님께서 그것을 존재케 하신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실 목적을 현실화시킬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세계 역사에 관하여 무천년설 주창자들이 냉정하고 현실적인 낙관주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현재의 통치에 있어, 하나님의 왕국의 임재에 있어서 그리고 목표를 향한 역사의 운동에 있어서 믿음은 이 세상의 죄의 존재와 사악한 왕국의 지속적인 발전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에 의해서 수반된다. 무천년설 종말론은 배교의 절정과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한 개인의 적그리스도의 최종적인 출현에 의한 환란을 기대한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완벽한 사회가 현 시대에는 현실화 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이긴 그리스도의 승리는 결정적이었으며, 그리스도는 현재 보좌에 알아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천년설 종말론의 지배적인 분위기는 낙천주의 즉, 기독교 낙천주의이다. 이것은 우리가 완전 무방비의 세계 위기나 절대적으로 뒤집을 수 없는 사회 경향은 없다고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 위에 세워지고, 사랑 안에서 그 자체를 표현하는 소망인 희망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무천년설 종말론은 우리에게 한 현실주의를 제시하며, 그러면서도 기본적으로 낙천적인 세계 및 인생관을 제시한다. 그것은 흥분되고, 생기 돌고, 도전적인 하나의 종말론이다. 그것은 역사를 지배하시는 그리스도의 주권과 그의 왕국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하나의 영감적인 환상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하나의 종말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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